[페리 前美국방,北 核동결 상황 공개]

  • 입력 1997년 9월 4일 20시 29분


지난 94년 6월 북한의 핵무기개발 의혹이 한창 고조됐을 때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이 고조됐던 것은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 생생하다. 결과적으로는 때마침 이루어진 지미 카터 전미국대통령의 북한 방문과 뒤이은 북―미(北―美)경수로협상 타결로 한반도의 위기가 한 고비를 넘겼지만 당시 정황이 얼마나 긴박했었는지는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와 21세기 국가발전연구원(이사장 박관용·朴寬用신한국당의원)주최 세미나에 참석차 방한중인 윌리엄 페리 전미국방장관은 4일 『불과 1시간 차이로 역사가 달라졌다』고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공개했다. 당시 미국은 북한에 대해 군사적 대응을 하려 했으나 이같은 결정을 내리기 직전 북한측이 태도를 바꾸는 바람에 평화적 해결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가 이날 「새로운 세계질서와 한반도」라는 제목의 기조연설에서 밝힌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94년 6월 미국이 대북제재를 단행하려 할 때 당시 페리 국방장관은 군사적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클린턴 대통령과 국가안보위원회 위원들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그는 클린턴 대통령에게 언젠가는 미국을 겨냥하게 될 핵무기를 북한이 보유하도록 내버려두는 방안과 재래식 전쟁의 위험을 감수하고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저지하는 방안 중 하나를 선택해줄 것을 요청했다. 클린턴은 후자를 선택했다. 이에따라 미 군부는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방지할 수 있는 세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페리 전장관은 『이들 모두는 남한 내의 미군 병력 증강을 요구하는 것이었으며 그중 한가지 대안은 꽤 큰 규모의 병력배치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이같은 상황은 북한측이 볼 때는 「도발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었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같은 계획 중 한 가지를 최종 선택, 한반도에 대한 미군병력의 증원배치를 승인해야 하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상황 앞에서 고민해야 했다. 마지막 결정을 내리기까지 이제 1시간 밖에 남지 않은 숨막히는 순간이었다. 이때 김일성을 만나기 위해 평양에 가 있던 카터 전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잠시 회의가 중단됐다. 카터 전대통령의 전언은 뜻밖에도 북한이 영변원자로의 폐연료봉 재처리 활동을 중단하는데 동의하고 핵개발 동결을 위한 미국과의 협상에 임하겠다고 밝혔다는 것이었다. 상황은 급전됐다. 그리고 미국은 북한과의 어려운 협상과정을 거쳐 북한의 핵개발계획을 동결시키고 한반도를 일촉즉발의 갈등상황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었다. 페리전장관은 이날 『북한은 그후 미국과 체결한 제네바 합의서의 기본적인 내용을 준수해왔으며 그에 따라 한반도 지역이 더욱 안전해졌다』고 평가했다. 그는 그러나 『한반도의 불안정한 균형은 북한의 핵무기 보유나 경제붕괴에 따른 북한정권의 「내부로부터의 붕괴」에 의해 깨질 수 있다』는 경고를 잊지 않았다. 〈한기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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