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식의 오늘과 내일]배우 김영애의 모래시계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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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식 문화부장
김갑식 문화부장
전남 곡성군 오곡면 섬진강로 압록역(鴨綠驛). 이름에 얽힌 유래가 있다. 이 지역은 900년 전 섬진강과 보성강의 푸른 물이 합류하는 곳이라 합록(合綠)으로 불렸다. 400여 년 전 마을이 생기면서 오릿과 철새들이 날아들어 합(合) 대신 오리 압자(鴨)가 됐다.

이 간이역은 2008년 승객이 줄어 폐역이 됐다. 출입이 어렵지만 밖에서 한때 볼거리였던 ‘김영애 소나무’도 볼 수 있다. 1995년 직장인들의 귀가를 재촉한다고 해서 ‘귀가시계’로 불렸던 드라마 ‘모래시계’가 촬영됐던 곳이다. 극 중 태수(아역 김정현) 어머니로 출연한 김영애는 빨치산 남편의 뼈를 지리산 자락에 뿌린 뒤 생을 마감한다.

철길과 소나무, 그리고 허공에 휘날리던 스카프. 20년이 훨씬 지났지만 아직도 그 장면이 생생하다.

지난 9일 전해진 그의 죽음은 잊고 있었던 다른 장면들도 불러냈다. 이 드라마는 5·18민주화운동과 삼청교육대 등을 소재로 다룬 방송사의 야심작이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배우들과 김종학 PD, 송지나 작가가 참석한 간담회도 열렸다.



흥미로웠던 것은 등장하는 장면이 많지 않았음에도 최민수 박상원 고현정 등 주연들 못지않게 태수 어머니에게 여러 질문이 나왔다는 점이다. 어린 태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과 허공에 날리던 스카프의 애처로움에 매료된 기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의 답변을 100% 그대로 옮길 수는 없지만 이런 말들로 기억된다. “제가 나오는 분량은 적고 주인공들도 있는데 과분하게 잘 봐주신 것 같다” “스카프 신이 강렬한 것은 연기보다는 작가와 PD 덕분인 것 같다.” 하지만 그때 40대 중반의 그는 주인공 이상으로 아름다웠고 빛났고 겸손했다.

안타깝게도 고인이 된 김 PD와는 ‘모래시계’를 계기로 가끔 전화 통화를 하거나 사석에서 소주 한잔을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됐다. 이 작품에 얽힌 화제는 시간이 흘러도 빠질 수 없는 진짜 ‘양념’이었다. “초반 분위기를 잡을 수 있을까 걱정됐지. 그 역할을 해준 배우가 김영애 씨야. 눈빛만으로 연기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연기자 중 한 명이야. 서득원 (촬영)감독이 찍은 스카프 장면을 보는데 울컥했어. 드라마가 정말 되겠다 싶었어.”

그 뒤 팬의 한 사람으로 배우 김영애의 길을 지켜봤다. 그 사이 여러 모습들이 지나갔다. 드라마 ‘황진이’의 행수기생, 영화 ‘변호인’의 국밥집 주인과 ‘판도라’의 노모, 유작이 된 드라마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의 자식 못 이기는 엄마…. 암으로 투병 중인 그가 외출증을 끊어 촬영에 임했고, 정신이 맑아야 한다며 진통제 없이 버텼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병상에서 진행된 한 인터뷰에서 나온 그의 말이다. “평범하게 태어나서 공부도 별로 많이 못 했는데… 모범적으로 살지도 못 했고… 단지 운이 좋아서 배우가 됐고, 과분하게 사랑받았어요.” “배우가 그리 잘났나? 아니에요. 좋은 배우, 좋은 역할은 모두가 같이 만드는 거예요.”

그의 말들은 독백이자 세상을 향한 유언처럼 들린다. 팬의 한 사람으로 지켜본, 66년에 걸친 김영애의 모래시계는 이렇게 끝났다.

모래시계는 인생을 닮았다. 사르르, 언젠가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대통령 선거 D―20. 미래를 좌우할 대한민국의 모래시계가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대선 주자들은 시대라는 블록버스터의 주연 배우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에게 그리움을 남기고 떠난 한 배우의 겸손한 삶은 소중한 교훈이다. ‘운이 좋아 정치인 됐고 과분하게 사랑받고 있다’고. ‘좋은 정치는 모두 같이 만드는 것’이라고. 부끄럽지 않을 ‘유언’을 남기시라!
 
김갑식 문화부장 dunanworld@donga.com
#배우 김영애#드라마 모래시계#2017 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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