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가 대세 된다면 좀 망가진들 어떠으리!”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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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리 열풍’ 몰고 온 배우 김보성의 ‘의리학’

의리의 사나이 김보성이 그가 2005년부터 홍보대사를 맡고 있는 서울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건물 앞에 섰다. 그는 “이 시대 최고의 의리는 나눔 의리다”며 “우리가 나눔 의리를 지킬 때 선량한 사람들이 억울하지 않게 잘 사는 사회가 올 것이다”고 외쳤다. 그는 1시간 30분간 진행된 인터뷰에서 ‘의리’를 45번이나 입에 올렸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의리의 사나이 김보성이 그가 2005년부터 홍보대사를 맡고 있는 서울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건물 앞에 섰다. 그는 “이 시대 최고의 의리는 나눔 의리다”며 “우리가 나눔 의리를 지킬 때 선량한 사람들이 억울하지 않게 잘 사는 사회가 올 것이다”고 외쳤다. 그는 1시간 30분간 진행된 인터뷰에서 ‘의리’를 45번이나 입에 올렸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의리’ 또는 ‘으리’다.

요즘 대중문화계를 들썩이게 하는 유행어다.

유래는 이렇다. 배우 김보성(48)이 지난해 3월 주연한 영화 ‘영웅: 샐러멘더의 비밀’ 시사회에서 무릎을 꿇고 “흥행하든 안 하든 평생 의리로 모시겠다”고 말했고, 개그우먼 이국주가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보성댁’으로 나와 ‘으리 으리’를 외쳤다. 이후 인터넷에서 ‘의리 시리즈’가 번져 나갔다. 이달 초 김보성이 비락식혜 CF에서 “우리 몸에 대한 으리”를 외치며 “항아으리(항아리)” “신토부으리(신토불이)”를 외치자 의리는 대세 유행어가 됐다.

6·4지방선거도 ‘의리판’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선거 포스터에 김보성 캐리커처와 함께 ‘약속을 지키으리’라고 썼다. 다른 지방선거 후보들도 ‘지역과의 의리’를 약속하고 나섰다.

23일 김보성을 만났을 때 길 가던 유치원생들이 그를 보자 “으리 으리”를 외쳤다.

―유치원생까지 의리를 말한다.

“‘김보성 대세’보다는 의리의 대세가 됐으면 좋겠다. 인기를 누릴 때가 아니라 겸허하게 의리 진정성을 계몽할 때다.”

―비락식혜 광고는 대놓고 웃기려고 찍은 건가.

“전혀 아니다. 고속촬영기법(슬로모션)으로 촬영하기에 ‘오, 멋있는 건가’ 하면서 진지하게 주먹을 날리고 남자답게 식혜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런데 광고를 보니 블랙코미디였다. 나를 희화화하고 망가뜨려도 의리가 부각된다면 고무적이다.”

―당신의 얼굴과 의리를 도용하는 곳이 많다.

“(박원순) 포스터에 나온 줄 몰랐고 허락한 적도 없다. 광고는 뜨기 전에 찍어서 큰돈을 번 것도 아니다. 물밀듯이 광고 제의가 들어오고 있지만 의리의 상업화를 경계하기에 사나이의 기상을 담은 광고만 찍을 거다. 의리에게 누를 끼칠 수 없다.”

―왜 의리 열풍일까.

“시대가 의리를 불러낸 것 같다. 약육강식,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상처받고 지쳐가다가 의리를 외치면서 조금 위로 받는 것 아닐까.”

―의리가 결국 ‘내 편 챙기기’란 비판도 있다.

“의리의 1단계는 친구와의 의리, 2단계는 공익과의 의리, 3단계는 나눔의 의리다. 내가 외치는 의리는 공익과 나눔이다. 아! 의리의 시대가 온다고 생각하면 벅차서 눈물이 난다.”

김보성은 지난달 22일 세월호 희생자 유족에게 써달라며 은행에서 대출받은 1000만 원을 기부했다. “의리의 사나이인데 빚이 많아 능력이 이것밖에 안 돼 원망스럽다”고 했다.

―정말 빚을 냈나.

“나도 아들 둘을 키우는 아버지인데 그분들 생각하면 몸이 아프고 가슴이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잠수부 자격증이 없는 것이 원망스럽고 영화처럼 배를 뚫고 들어가고 싶은데 그것도 안 되고. 그래서 적은 금액을 마련했다.”

―가족들은 동의했나.

“결혼 전에 아내에게 의리가 있느냐고 물어봤다. 그래서인지 아내도 남을 돕는 데는 뜻이 통한다. 인생 성공의 기준은 물질과 명예가 아니다. 주변에서 외제차로 바꾸라고 해도 국산 자동차를 6년째 타고 있다. 휴대전화도 오래된 피처폰을 쓰고 번호도 여전히 011로 시작한다.”

―배우도 의리 때문에 한 건가.

“김홍신 작가의 ‘인간시장’을 감명 깊게 읽었다. 정의와 의리를 위해 죽고 사는 주인공 장총찬에게 매료됐다. 내가 선글라스를 끼는 이유는 고교 때 친구들 괴롭히던 ‘야생마’란 조직과 맞서 싸우다 부상을 입어서 왼쪽 눈이 뿌옇게 보이기 때문이다. 고교 졸업 후에도 남자 3명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남녀를 구해준 적이 있는데 경찰서에 가니 쌍방폭력이 되더라. 영화 속에서 정의와 의리를 실현해보려고 연기자가 됐다.”

―데뷔작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년) 때는 ‘제임스 딘’으로 불릴 만큼 잘생겼고 ‘투캅스2’(1996년)에선 탄탄한 근육질을 자랑했는데, 지금은 몸이 많이 무거워 보인다.

“왜 한국에선 술과 의리를 결부시키는지 모르겠다. 이제 몸을 만들어서 본업인 액션배우로 활약해야지.”

인터뷰 도중 김보성은 걸려온 전화를 급히 받더니 “의리로 힘내시고, 빨리 확인해보시라”며 끊었다. 아는 형님이 정말 급하다고 해서 200만 원을 보냈다고 한다. ‘관우의 의리론’을 재밌게 읽었다는 그지만 의리의 길은 험난해 보였다.
         
▼ 불신-혼돈에 빠진 세상, ‘의리’ 일성에 열광 ▼
음료광고도 대박… 매출 50% 쑥


‘의리’ 돌풍을 일으킨 식혜 광고. 팔도 제공
‘의리’ 돌풍을 일으킨 식혜 광고. 팔도 제공
“‘의리’로 꼭 사먹을게요.”

김보성은 요즘 이런 인사를 많이 받는다. 그가 광고 모델로 출연한 후 비락식혜 매출이 급격히 오르고 있다. 제조사인 팔도 관계자는 “편의점을 중심으로 판매액이 많게는 50% 가까이 올랐다”며 “식혜가 전통 음료임을 감안해 젊은 소비자를 잡으려고 인터넷 유행어를 활용했는데 그 전략이 통했다”고 전했다. 왜 의리일까.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세월호 참사로 믿었던 가치들이 무너지면서 불신과 혼돈에 빠진 사람들이 광고에서라도 배신하지 않는 의리를 찾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김보성이 오랜 시간 쌓아온 캐릭터의 힘도 컸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배를 버리고 떠난 선장,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는 국가보다는 10년 이상 의리만 외친 김 씨에게 더 믿음이 간다”고 했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김보성#의리#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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