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하정규]영화 ‘모범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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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17일 11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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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와 거래의 결과는?

대법원 앞에는 정의의 여신상이 서 있다.

눈을 가린 채 한손에는 칼, 다른 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는 여신의 모습은 어떤 사사로움에도 흔들림 없이 법을 공평하게 집행하라는 사법 정신을 상징한다.

그 런데 만일 당신이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딸이 참혹하게 강간당하고 살해됐는데 검사가 범인과 형량을 거래한다면? 그 결과 살인범이 가벼운 형량으로 풀려난다면? 영화 '모범시민'은 바로 법의 엄정함을 소리없이 무너뜨려 선량한 시민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미국의 사법 시스템에 대해 통렬한 비판의 메시지를 던진다.

평온한 삶을 살던 엔지니어 클라이드(제라드 버틀러)는 어느날 집에 들이닥친 괴한에게 아내와 딸을 잃고 만다.
평온한 삶을 살던 엔지니어 클라이드(제라드 버틀러)는 어느날 집에 들이닥친 괴한에게 아내와 딸을 잃고 만다.


가족을 잃은 남자

어린 딸이 구슬을 꾀어 아빠에게 줄 목걸이를 만들고 있고 아빠는 그것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이 가정의 단란한 평화는 느닷없이 들이닥친 두 명의 강도에 의해 무참하게 파괴된다. 남자(제라드 버틀러 분)가 묶인 채 바라보는 앞에서 결국 아내와 딸은 처참하게 강간당하고 살해된다.

결국 강도들는 붙잡히지만 딸에 대한 결정적 살인 물증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재판은 난항을 겪게 된다. 담당 검사(제이미 폭스)는 두 명 모두 유죄를 선고받기 위해서 남자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딸을 살해한 공범은 형량을 5년으로 낮추기로 변호사 측과 타협하게 된다. 결국 아내를 살해한 범인은 사형을 받지만 딸의 살인범은 가벼운 형량으로 풀려나게 된다.

10 년이 지난 후 아내를 살해한 범인이 사형을 당하게 되는 시점에 나타난 남자는 약물주사를 바꿔치기해서 사형수를 극렬한 고통 속에 죽게 만들고, 이미 풀려난 딸의 살인범을 교묘하게 유인해 전동톱으로 사지를 절단하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복수를 한다. 검사는 이 사건의 피해자였던 남편을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하지만 확실한 물증이 없어서 고민을 하게 된다. 검사가 그에게 자백을 종용하자, 남자는 그 댓가로서 자신의 더욱 '거대한 복수극'을 시작할 거래를 검사에게 제안하게 된다.

미국식 사법거래의 모순

사 법거래 제도란 주로 미국을 비롯한 영미법 계통의 국가들이 채택하고 있는 제도이다. 미국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것처럼 수사에 협조하는 범인 또는 유죄를 인정하는 범인에게 형량을 줄여주는 제도로서 사법적인 절차와 비용을 절약하는 유용한 면이 있다.

그 러나 영화에서 이 제도는 범죄자의 형량을 줄여주는 대신 검사의 승소 실적을 높여주는 제도로 악용된다. 살인 같은 중범죄자들의 혐의를 끝까지 입증하는 대신 적당한 타협으로 형량을 '할인해' 줌으로써 검사, 판사, 변호사, 범인까지 모두가 누이좋고 매부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모순을 만들게 된 것이다.

검사는 이런 사법제도를 활용해서 뛰어난 '승소율'을 올려 출세가도를 달리지만, 결국 그 결과는 이런 흉악범들을 풀어주어 도시의 범죄율과 선량한 시민들의 피해를 높이는 악순환을 가져 온다.

두 범죄자에게 잔인한 복수를 한 혐의로 붙잡혀 온 남자는 이번에는 용의자의 입장에서 거꾸로 당당하게 물증을 요구하여 검사를 당황하게 만들고, 증거부족으로 풀려날 상황에서 오히려 자신같은 명백한 살인자를 왜 풀어주냐며 판사를 욕하고 조롱함으로써 자진해서 법정모독죄로 교도소에 수감되게 된다.

제라 버틀러 주연의 ‘모범시민’
제라 버틀러 주연의 ‘모범시민’


단순한 복수가 아닌 사법체계에 도전

범죄와 복수의 스토리를 다룬 영화들은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다. 결국 관객들은 악당이 잡혀서 감옥에 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참혹하게 고통을 받고 죽기를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인가 보다.

대 부분의 헐리우드 영화에서는 마지막에 범인이 감옥으로 가는 대신 주인공의 손에 죽게 된다. 우리나라도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 '공공의 적' 시리즈를 비롯해서 형사나 검사가 범인을 끝까지 자기 손으로 응징하는 영화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정의로운 검사나 형사, 또는 피해자가 극악한 범죄자를 응징하거나 복수를 하는 그런 단순한 내용이 아니다. 그렇다고 경찰이나 검찰 내부의 부패나 비리를 적발하고 응징하는 스토리와도 다르다. 단순한 복수를 넘어서 불합리한 사법체계 전체에 대한 당당하고 대담한 정면 도전을 시도하는 것이다.

비참하게 가족을 잃은 피해자가 복수를 위해 살인자가 되어 검사에게 거래를 요구하고 조롱하면서 한편으로 잔인한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은 관객으로 하여금 어느 편을 들어야 하는지 당황하게 만든다.

선과 악이 뒤엉킨 상태에서 바로 이런 당황스러움과 모순은 천재적이고 치밀한 남자의 범행 계획과 맞물려 관객을 팽팽한 긴장과 몰입으로 이끈다. 제라드 버틀러의 넘치는 카리스마가 더욱 빛을 발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래도 살인자와 거래할래?'

이 영화의 핵심은 바로 이런 거래와 조롱에 있다. 남자는 자백을 하겠다며 거래를 하지 않을 수 없도록 검사를 옭아맨 다음 그 댓가로 처음에는 우스꽝스러운 요구들을 한다. 일정 시간 내에 감옥 안으로 푹신한 침대를 넣어달라거나 최고급 레스토랑의 스테이크 요리를 넣어달라거나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거래를 제 시간에 이행하지 못한 댓가로 과거 자기 가족 살인사건을 담당했던 변호사와 판사를 차례대로 살해한다. 감옥에 수감돼 있으면서도 신출귀몰한 방법으로 원격 살인을 시행한 것이다. 결국 검사는 이 남자가 특수부대 출신으로 지난 10년간 자기 가정을 파괴한 원흉인 사법체계에 대해 치밀하고 거대한 복수를 준비해 왔음을 알게 된다.

과거 사건을 담당한 변호사, 판사가 죽어나가는 진퇴양난 속에서, 결국 검사는 범인이 요구하는 거래를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많은 피해가 일어나면서 곤경에 처하게 된다. 이제는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과 법무부 직원들조차 살인의 위협 속에 떨게 되자 검사는 스스로 인정하기 싫지만 자신이 사법거래를 통해 얻은 높은 유죄율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뼈저리게 체감하게 되는 것이다.

남자의 메시지는 한마디로 압축된다. '이래도 살인자와 계속 거래할 것인가?'

괴한들에게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잃은 클라이드는 직접 범인들에게 복수를 하기로 결심한다.
괴한들에게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잃은 클라이드는 직접 범인들에게 복수를 하기로 결심한다.


복수 뒤에 숨겨진 '거대한 계획'

사상 유래없는 교도소 수감자의 연쇄적인 원격 살인에 온 도시는 공포에 휩싸이고, 시장까지 나서서 살인을 막지 못하는 검사와 법무부를 다그친다.

시 시각각 조여오는 살인 위협 속에서 법무부 직원들은 하나, 둘 살인자와의 타협이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깨닫게 되고, 시장도 이 도시의 법체계를 다잡음으로써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도록 명령한다. 와중에도 남자는 지금까지의 살인이 '거대한 계획'의 서막일 뿐임을 강조한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필사적으로 이 수감자의 신출귀몰한 범행 수법을 수사하던 검사는 마침내 단서를 잡아 그 전모를 밝히게 된다.

자신의 범행수법이 탄로났음을 알게 된 남자는 자신의 죽음을 알리는 검사의 마지막 말을 듣게 된다.-'나는 이제 더 이상 살인자와 거래하지 않아'

결 국 법을 준수하던 '모범시민'이 사상 최악의 살인자로 변신해 거대한 복수를 완성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역설적으로 살인자와의 거래는 더 큰 재앙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검사에게 깨닫게 하고 사법거래의 모순과 폐해를 사회 전체에 경고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그의 '거대한 계획'이었던 것이다. 화염 속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남자는 딸아이가 남긴 목걸이를 서글프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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