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떠난 어머니에 대한 회한 담았다”

  • 입력 2009년 6월 9일 02시 54분


‘걸어도 걸어도’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때때로 못 견딜 만큼 미워지는 가족을 끝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관객이 한번쯤 곱씹어보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미옥 기자
‘걸어도 걸어도’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때때로 못 견딜 만큼 미워지는 가족을 끝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관객이 한번쯤 곱씹어보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미옥 기자
日영화 ‘걸어도 걸어도’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나는 언제나 한 박자씩 늦어.”

18일 개봉하는 ‘걸어도 걸어도’에서 주인공 료타(아베 히로시)가 어머니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돌아서서 중얼거리는 대사다. 영화에서 료타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에도 결국 ‘한발 늦는 바람에’ 작은 소원 하나를 들어주지 못한다.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47)은 “모친이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신 후에 쓴 시나리오”라며 “운전면허 따는 것을 미루고 미루다 ‘아들 차 얻어 타고 장 보러 가고 싶다’는 소원을 들어드리지 못했다”고 말했다.

“료타의 어머니가 좋아하는 노래로 나오는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는 1968년 일본에서 히트한 곡입니다. 제 어머니가 생전에 즐겨 부르셨죠. 영화 제목 ‘걸어도 걸어도’는 이 노래 가사에서 따왔습니다.”

감독의 개인적 사연에서 시작한 이야기지만 영화는 감정에 휘둘린 신파로 흘러가지 않았다. 10여 년 전 물에 빠진 소년을 구하다 죽은 맏아들의 기일을 맞아 오랜만에 모인 가족. 은퇴한 노부부와 아들 딸 내외, 3명의 손자손녀는 화기애애한 얼굴 뒤로 각각의 미묘한 갈등을 조금씩 드러낸다. 카메라는 냉정한 시선을 유지하며 이 가족의 이틀을 좇는다.

“영화의 시선은 처음에 아들 료타의 것인 듯 시작했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손자 아쓰시(다나카 쇼헤이)의 것으로 옮아가죠. 감독인 제가 개인적 슬픔에 휘둘리면 최악의 삼류 영화가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혈연이 없는 아쓰시의 눈을 빌려 좀 더 객관적인 시선으로 이들의 ‘관계’를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이 가족의 사연은 복잡하다. 의사인 아버지는 가업을 잇지 않은 둘째아들 료타가 늘 불만이고 그만큼 일찍 죽은 맏아들을 아쉬워한다. 어머니는 자식 있는 미망인과 결혼한 료타에게 “애 생기기 전에 이혼하라”고 권한다. 딸 내외는 가족 모두를 늘 상냥히 대하지만 내심 죽은 맏아들 대신 부모 집을 물려받고 싶어 한다.

제사를 모시려고 모인 떠들썩한 자리. 미묘하게 얽힌 감정의 골은 섬뜩한 속내를 문득문득 털어놓는다. 하지만 그 표현은 대부분 그저 ‘지나가는 말’에 그친다. 자신의 직업을 못마땅해 하는 아버지에게 들이댄 료타의 분노는 왁자지껄 음식 얘기에 파묻혀 지나간다. 혈연 없는 손자에게 거리를 두는 시어머니에 대한 며느리의 불만도 가벼운 한숨으로 흘러간다.

“오래 함께 산 가족 사이에는 일일이 따지고 헤아릴 수 없는 사소한 다툼과 회한이 쌓이기 마련이잖아요. 그건 어떤 계기로 확실히 해결되는 ‘문제’가 아닐 거라고 봅니다. 쌓인 채로 가끔 토로하며 서로 조금씩 원망도 주고받고 사는 것 아닐까요.”

영화 끝 부분. 다 큰 아들을 배웅하며 어머니가 말한다. “치과에 꼭 가렴. 주말엔 푹 쉬고. 넌 아직 늙지도 않았지만 팔팔한 나이도 아니란다. 아, 또 뭔가 할 말이 있었는데….”

고레에다 감독은 “당장 듣기 성가시지만 살아 있어야만 들을 수 있는 어머니의 잔소리 같은 것. 그게 가족이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아픈 상처를 주고받으면서도 가족이 흩어지지 않는 이유가 궁금하다고요? 글쎄요. 제 부모님은 평소에 대화 한마디 안 하시면서 50년 가까이 함께 사셨습니다. 20년쯤 더 살아본 다음 알게 되면 대답해 드릴게요.(웃음)”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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