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일이다. 한 탤런트가 그다지 친분이 두텁지 않은 이순재(73) 선생님께 주례를 부탁했다. 이 선생님은 바쁜 스케줄을 조정하며 기꺼이 승낙해 주셨다.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다.
지난해 말 ‘연극열전 2’의 프로그래머로 ‘라이프 인 더 씨어터’ 공연을 위해 선생님과 함께 공연 작업을 하게 됐다. 준비 과정에서 이 선생님을 더 많이 알아갈수록 배우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존경할 만한 분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인터뷰 전날 밤 펜을 들고 질문을 정리하는 나를 보고 아내가 “이젠 별걸 다 하시네”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인터뷰가 기다려졌던 것은 이 선생님에 대한 평소의 마음 때문이었다. (인터뷰 뒤 이 선생님은 30일 모친상을 당했다. 다른 일정은 모두 취소하면서도 연극은 관객과의 약속이라며 2회 공연에 모두 출연했다.)
▽조재현=아직 연기 자질이 부족한 배우를 캐스팅하는 방송사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훌륭한 재료를 쉽게 써버리는 통에 수명이 길게 갈 재목이 사라지고 있다’고 안타까워하시던 말이 기억납니다.
▽이순재=한국 드라마의 제작 여건은 세계적으로 유례없어. 갓 나온 대본으로 단기간에 많은 분량을 찍어야 하는 드라마 연기는 노련한 배우도 힘든 법이야. 신인 배우들이 고민 없이 연기하는 것을 보면 연기의 ‘문턱’에서 연기 인생을 마치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되지.
▽조=선생님께서는 흑백 TV 드라마와 영화, 연극의 초기부터 지금까지 주연을 맡아 왔습니다. 하지만 대중이 열광하는 첫 번째 스타는 아닌 듯합니다. 혹 그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이=TV 탤런트 1세대로 연기를 시작한 나는 영화로 넘어가면서 스타성이 아니라 실력으로 승부하자고 생각했어. 당시 후시 녹음 시스템에서 목소리로 내면 연기까지 할 수 있다는 자부심도 있었지. 외향에 치중한 것이 아니라 내 조건에 충실하게 연기에 몰두한 것이 지금까지 연기를 할 수 있도록 만든 비결이야. 가장 밑바탕엔 연극이 중심으로 있지.
▽조=솔직히 이전보다 최근 선생님의 연기에 경의를 표합니다. 과거에는 강철 같은 완벽함이 느껴졌지만 전 개인적으로는 강철의 차가움보다 나무의 따뜻함이 좋습니다.
▽이=MBC ‘거침없이 하이킥’ 이후 친근한 느낌이 생긴 것 같아. ‘사랑이 뭐길래’의 대발이 아빠 시절에도 꽤 인기가 좋았는데 말이야. 국회의원 선거운동 때였는데, 동네 아이들이 30명씩 따라다니는 거야. 보좌관들이 말리는데도 일렬로 세우고 쓰레기통 위에 앉아서 사인을 해 준 적도 있어.
▽조=현역 배우 중에서도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시죠. 워낙 ‘체력이 좋다’ ‘최고의 암기력을 가졌다’는 이미지 때문에 스스로 어려움을 느낄 때도 있었는지요.
▽이=내 건강의 비결은 정신력과 자존심이야. 배우의 치명적 조건은 암기력의 쇠퇴지. 대사 틀려서 후배들에게 누를 끼쳐서는 안 되잖아. 내 나름대로 암기력을 키우는 몇 가지 방법이 있어. 하루에도 몇 번씩 조선 왕조, 명산 이름, 그리고 미국의 역대 대통령과 주 이름, 일본의 47현 이름을 줄줄 외우는 거야.
▽조=얼마 전 ‘라이프 인 더 씨어터’에서 선생님 연기를 보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선생님의 눈시울도 빨갛게 달아오른 그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배우의 인생 이야기’라는 이 연극에 선생님 모습이 많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공연되고 있는 ‘라이프 인 더 씨어터’(서울 동숭아트센터·8월 10일까지)를 보고 어떤 관객들은 노배우 이순재의 연기에 “귀여워”라는 탄성을 내지른다. 혹자는 그런 관객의 경박스러움을 비웃을 수도 있고, 대배우에게 어울리는 그럴듯한 평을 찾기 위해 노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귀엽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는 배우 이순재가 부럽다. 그 또한 마음속으로 빙그레 미소 짓고 있지 않을까.
정리=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 이순재는
△ 1935년 함북 회령 출생 △서울고, 서울대 철학과 졸업 △1956년 연극 ‘지평선 넘어’로 데뷔
△ 출연작: 연극 ‘늙은 부부 이야기’ ‘세일즈맨의 죽음’ ‘바냐 아저씨’, 영화 ‘밤의 찬가’ ‘윤심덕’ ‘토지’,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 ‘목욕탕 집 남자들’ ‘허준’ ‘이산’,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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