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해변의 여인’에 담긴 철학 읽기

  • 입력 2006년 9월 14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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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지식인의 위선이 풍자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에서 특히 빛납니다. 신작 ‘해변의 여인’에선 영화감독 중래(김승우)가 문숙(고현정)을 옆에 앉혀두고 종이에 그림을 그려가면서 늘어놓는 궤변이 일품이죠. 중래는 문숙과 몸을 섞은 사이. 또 다른 여자 선희(송선미)와 침대에 들었다가 문숙에게 발각된 중래는 지성으로 포장된 화려한 언변으로 난감한 상황에서 탈출합니다. 아니, 문숙의 과거를 들먹이면서 오히려 “피해자는 나 자신”이라고 주장합니다.》

중래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①“나는 지금 ‘나쁜 이미지’와 싸우느라 힘들다”→②“너(문숙)는 과거 외국 남자와 잤다고 고백했는데, 외국 남자와 네가 자는 장면이 자꾸 떠올라 난 괴롭다. 그 장면이 바로 ‘나쁜 이미지’다”→③“따라서 너의 일상 속 다양한 면모를 내가 받아들임으로써 너의 실체를 인식하고 종국엔 ‘나쁜 이미지’를 극복해 너를 다시 사랑해주겠다”는 것이죠.

중래의 장광설은 일견 지식인의 허위의식을 비꼬는 대목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홍상수의 영화세계가 고스란히 집약된 말이기도 합니다. ‘실체’에 근접하기 위해 ‘일상’에 눈을 돌린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먼저 중래가 늘어놓는 궤변을 그가 그리는 그림과 함께 살펴보죠. 무지하게 어렵습니다.

중래=나 나쁜 이미지하고 싸우고 있거든. 자, 이게(구불구불한 도형) ‘실체’라고 생각을 하자고. 그런데 예를 들어 사람들이. 여기(점 A), 여기(점 B), 여기(점 C). 이런 포인트에 계속 시선이 가면, 환기되는 이미지가 생기게 돼요. 이런 식(삼각형 ABC)으로. 네가 외국 남자하고 잔 건…. 이거(점 A)는 섹스할 때 여자가 신음하는 얼굴이라고 하고, 이거(점 B)는 그 외국 남자의 성기 이미지라고 하고, 이거(점 C)는 섹스 비디오에 나오는 이상한 체위라고 생각을 할 때, 이 세 포인트(점 A, 점 B, 점 C)가 세트(삼각형 ABC)가 되는 순간에 기존의 불결한 이미지(삼각형)에 딱 맞아떨어지는 거거든. 그럼 실체(구불구불한 도형)는 없어지고 이 이미지(삼각형)만 남게 되는 거거든. 그런데 예를 들어서 한 요 포인트(점 D) 정도에 네가 전날 밤에 떡볶이 먹고 해피해하는 얼굴을 넣고, 그리고 여기(점 E)에다가는 너 친한 친구가 아픈데 걱정하는 네 예쁜 얼굴을 넣고, 그리고 이 정도(점 F)에 너 똥 누는 얼굴 정도를 넣자고. 그래서 이렇게 연결(점 A-C-F-B-E-D-A를 차례로 연결)을 하면 대강 뭐, 이런 도형(육각형)이 나오겠지, 그치?

문숙=응.

중래=근데 이건(육각형) 자주 보는 게 아니니까 쉽게 잡히지가 않을 거라고. 그런데 어쨌건 이 삼각형(삼각형 ABC)보다는 실체(구불구불한 도형)에 가깝다는 거지.

문숙=응.

중래=그러니까 계속 노력을 하다 보면 이 사악한 이미지(삼각형)를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 우리는 이 다른 포인트들(점 D, 점 E, 점 F)을 같이 볼 수 있게끔 노력을 해야 될 것 같아. 무슨 말인지 알아?

문숙=훌륭하다. 자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어?

중래=허허. 내가 이렇게 싸우는 거야, 지금.

자, 이해가 가시나요? 아직 어렵다고요? 그래서 제가 서울 중동고 안광복(철학박사) 선생님에게 물어봤습니다. 그는 구조주의의 관점에서 다음처럼 설명해주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한 사회가 공유하는 ‘판단 틀’이 있어야 이해나 대화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합니다. 이를 그는 ‘에피스테메(인식구조)’라고 했지요. 예를 들어볼까요? 목욕탕 안에서는 모두가 벌거벗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청와대 만찬에서 그러고 있으면 어떨까요? ‘불륜’도 마찬가지입니다. ‘섹스는 결혼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허용되는 친밀하면서도 배타적인 육체적 결합’이라는 세속의 에피스테메로 보면, 점 ABC가 이루는 삼각형은 명백한 불륜입니다. 그러나 ‘불륜의 에피스테메’를 벗어나 ‘일상의 에피스테메’(육각형 ACFBED)로 간다면 어떨까요?

문숙을 떡볶이 먹고 행복해하고 아픈 친구 걱정하며 똥 누고 시원해하는 하나의 ‘인간’으로 보면, 낯선 남자와 뒤엉킨 그녀의 모습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성욕은 잠이나 식욕만큼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요.”

아, 역시 개똥철학이 아니었군요. 영화감독은 진정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고현정 김승우의 영화 ‘해변의 여인’ 시사회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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