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신주쿠 여고생…’式 사랑방정식

  • 입력 2005년 10월 13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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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프리비젼
사진 제공 프리비젼
《외판원인 43세 남자 이와노조는 18세 여고생 구니코를 납치한다. 자신의 공동주택으로 구니코를 데려간 이와노조는 구니코의 손에 수갑을 채워 놓고 감금한 채 “너를 사육해서 정신과 몸이 하나가 되는 완전한 사랑을 이루고 싶다”고 말한다.》

“차라리 성폭행을 하고 나를 놔 달라”는 구니코의 애원에도 남자는 “진심이 아닌 섹스는 할 수 없다”며 거부한다. 끼니때마다 정성스레 음식을 챙겨주는 이와노조는 쓰라린 과거를 털어놓고, 구니코는 점점 이와노조에게 사랑을 느낀다. 함께 온천 여행을 다녀온 두 사람은 “아, 이게 완전한 섹스야”라며 첫 성관계를 맺는다.

일본에서 실제 발생했던 사건을 토대로 한 일본영화 ‘신주쿠 여고생 납치사건’(일본 제목 ‘완전한 사육’). 이 영화 속 ‘사랑’을 보는 시각은 관객의 성별(性別)에 따라 천양지차가 날 만하다. ‘여성을 사육해 진정한 사랑을 이룬다’는 아이디어 자체가 논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14일 개봉에 앞서 시사회에서 이 영화를 미리 본 중년 여자와 중년 남자가 극과 극의 반응을 보였다. 이런 간극은 사랑과 소유를 보는 여성과 남성의 시각차이기도 하다.

▽여=사랑이란 쌍방향이어야 한다. ‘사육’을 통한 소유에서 사랑이 나온다는 생각은 여성을 생물학적 대상으로만 보는 남성 중심 시각이다. 성폭행으로 사랑이 싹틀 수 있다고 보는 김기덕식 사고와 무엇이 다른가. 납치와 감금을 통해 일단 여성을 고립된 환경에 두면 남자를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거라는 생각은 폭력이다. “팬티같이 꽉 끼는 건 몸에 안 좋아”라고 지껄이는 게 여자에 대한 세심한 배려라고? 자신이 사랑을 주는 한 그건 모두 사랑이라고 믿는 건, 남자란 동물의 뿌리 깊은 착각이다. 섹스가 끝난 뒤 구니코가 남자에게 “사육해 줘. 사육 당하고 싶어”라고 애원하는 건 오직 이기적인 수컷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일 뿐이다.

▽남=남자의 사랑 방식은 옳지 않다. 그러나 그에겐 절실함이 있다. 그는 과거 짝사랑하던 여자를 성폭행해 억지 결혼을 했지만 결국 여자는 낳은 아이를 데리고 도망갔던 과거가 있다. 남자는 ‘육체와 정신 중 어느 한쪽만 결여돼도 사랑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다. 이와노조는 구니코가 진정 자신을 사랑할 때까지 육체관계를 갖지도, 심지어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는 기다렸다. 사랑이 무르익을 때까지.

▽여=애완견 센터에서 팔리기를 기다리는 푸들이 한 마리 있다. 이 푸들이 누군가에게 팔려갔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해 주는 주인을 좋아하고 따른다. 이때 주인에 대한 푸들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인가? 구니코의 사랑은 푸들의 사랑이나 다름없다. 자신이 선택한 사랑이 아닌 것이다. 여자는 나르시시즘적 사랑에 빠졌을 뿐이다. 사랑을 받는 걸 자신이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거다. 사실은 자기 자신을 사랑했을 뿐인데….

▽남=여자의 사랑은 ‘스톡홀름 신드롬(인질이 인질범에 동화되어 동조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범죄심리학 용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증후군 자체를 ‘사랑이 아니다’고 보는 시각이야말로 사랑에 대한 폭력이다. 구니코는 이와노조를 분명 사랑했다. 계기나 동기로 사랑의 진정성을 일도양단하는 것 자체가 사랑을 모르는 거다.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랑이 있을까? 성폭행으로부터 시작된 영화 ‘오아시스’ 속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여=사랑 자체가 집착이요 도착일지 모른다. ‘사랑’만 있을 뿐 ‘바람직한 사랑’은 애초에 없는 건지 모른다. 그럼에도 사랑은 소통과 선택이어야 한다.

▽남=결혼식 날 처음 얼굴을 보고 ‘첫날 밤’에 들어간 조선시대 부지기수의 부부들을 생각해 보자. 이들의 결혼은 선택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세상에는 여러 가지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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