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엽/일사불란한 방송

  • 입력 2004년 6월 20일 18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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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불란(一絲不亂).’

사전적으로는 질서나 체계가 정연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요즘 같은 다양화 시대에는 차이나 다름을 존중하지 않는 앵톨레랑스(intolerance)나 획일적 집단적 사고라는 부정적 의미를 더 풍기는 듯하다. 노무현 대통령이 최근 언론사 경제부장단을 초청한 자리에서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 “일사불란을 싫어한다”고 한 것도 다른 의견을 존중하자는 의미일 듯하다.

그런데 탄핵 방송의 편향성을 지적한 한국언론학회 보고서가 10일 공개되자 KBS MBC 등 공영방송과 이른바 언론운동 진영이 일사불란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닮은 주장과 동어 반복의 반론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은 11일 “보고서는 다수당의 의회 폭거인 탄핵을 정치적 갈등 사안으로 파악해 기계적 중립에 가장 큰 가치를 두는 오류를 범했다”는 내용의 성명을 냈다. 같은 날 방송위원회 이효성 부위원장은 ‘오마이뉴스’에 “보고서는 공정성을 수학적 균형과 동일시한 오류를 범했다”고 기고했다가 부적절한 처신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이 부위원장은 탄핵 방송 분석을 언론학회에 의뢰한 곳이 바로 방송위라는 사실을 잊은 것일까?

15일에는 언론개혁국민행동 등이 기자회견을 열어 “보고서가 특정 정치적 견해에 치우쳤다”고 주장했으며, 탄핵 방송을 심의하는 방송위 보도교양 제1심의위원회의 한 위원도 16일 유사한 주장을 공개리에 밝혔다.

KBS와 MBC는 11∼17일 메인 뉴스에서 ‘보고서는 편파, 연구자는 편향’ ‘잘못된 보고서’ 등의 제목으로 네 차례씩 다뤘다. KBS2 ‘생방송 시사투나잇’은 15∼17일 매회 10여분씩, KBS1 ‘미디어 포커스’(19일)와 MBC ‘신강균의 뉴스 서비스 사실은…’(18일)도 같은 사안을 다뤘다.

두 방송사는 ‘탄핵 관련 시사프로그램 멘트 중 탄핵 반대 27, 찬성 1건’ 등에 대해 중립적 멘트가 더 많았다는 등 반론을 폈으나 전반적으로는 “당시 여론조사 결과를 반영했다”는 종래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특히 ‘생방송 시사투나잇’ ‘신강균의…’ 등은 두 책임연구원(교수)이 동아일보와 중앙일보에 칼럼을 기고했던 이력 등을 문제 삼아 보고서의 결론을 부정했다. 이는 언론개혁국민행동이 “특정 정치 세력의 입장을 옹호해 온 전력을 가진 인물이 어떻게 이번 연구자로 선정됐느냐”고 주장한 것과 닮았다. 두 프로그램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이 보고서를 크게 다룬 것은 신문개혁에 대한 물타기 의도”라며 비난의 화살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기도 했다.

문제는 이들이 주장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사투나잇’은 “보고서는 저널리즘 내용 연구의 기념비적 성과”라고 공식 입장을 밝힌 박명진 언론학회장이 인터뷰를 사절했다고 하면서 그가 엉거주춤하는 화면을 내보냈다. 또 언론학회가 보고서를 맡게 된 과정에 대해 한 방송위원의 실명을 거론하며 “(그의) 행적에 의구심을 갖고 있으며 지켜보겠다”고 방송했다. 이는 일사불란을 요구하는 으름장에 가깝다.

보고서 논란이 불거지자 한 중견 언론학자는 “방송사에서 전화왔다고 하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더라”고 말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일사불란의 독선을 걱정하는 이는 노 대통령뿐만이 아닐 것이다.

허엽 문화부 차장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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