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성-섬세함에 뚝심무장…"여성감독, 그들이 온다"

  • 입력 2003년 1월 15일 17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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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승혜씨가 본 2003년 女性감독들

여자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

몇 년 전 개봉된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의 포스터 카피는 ‘남자가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였다. 국가를 상대로 ‘밤이 부실한 남편과의 잠자리를 물어내라’는 소송을 건 여자를 통해 남편을 의지하고 사는 세상의 아내들에게 승리의 박수를 안겨준 내용이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가정의 중심을 남편으로만 보던 시절(?)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불과 5, 6년 사이,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 노무현 대통령당선자는 좌청룡으로 앉아 있는 추미애 의원을 든든함 그 이상의 두려움(∧∧)으로 평가하며 투명하고 솔직한 여성의 힘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을 피력했다.

평생 젓갈을 팔아 번 돈을 불우이웃에게 기증하거나 시장에서 장사해 모은 돈으로 장학재단을 설립하는 분들은 언제나 강인한 여성, 할머니들이었고 남자보다 씩씩한, 제복 입은 여사관생도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여성인력의 증가와 활발한 성과로 여성이 가장 빠르게 자리를 잡은 분야는 단연코 영화계다. 제작자, 프로듀서, 촬영, 조명, 마케팅, 분장, 의상, 아트 디렉터 등 여자라서 안 되는 일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곳이 바로 영화현장이 되었다.

▼영화본질에 주력 강한 설득력 보여줘 ▼

특히 여성감독들의 맹활약은 두드러졌는데,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나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여성감독의 섬세함과 뚝심으로 이루어낸 수작임을 인정받았다. 데뷔작 ‘미술관 옆 동물원’으로 두터운 팬 층을 확보하고 있던 이정향 감독은 2002년 최고의 화제작 ‘집으로…’를 통해, 잊고 지냈던 할머니에 대한 추억의 감성을 건드리며 흥행에서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또 이미연 감독이 ‘버스, 정류장’, 모지은 감독이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줘’, ‘낮은 목소리’의 변영주 감독이 ‘밀애’를 연출해 여성감독이라는 좁은 문을 넓게 열어준 모범적인 사례가 되었다.

그 결과들로 2003년에 만들어질 영화들 속에는 독특한 내용으로 승부하는 여성 감독들의 작품이 그 어느 해보다 많다.

겨울 산에서 조난 당한 두 남자가 생사의 문턱에서 떠올리는 한 여자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하는 영화 ‘빙우’는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도전하는 산악영화인데 김은숙 감독의 데뷔작이다. 이성재, 송승헌, 김하늘 등을 캐스팅했고 현재 촬영을 40%가량 끝낸 상태다.

영화 ‘4인용 식탁’에서 박신양, 전지현이라는 최고의 캐스팅으로 화제를 모은 이수연 감독은 앳된 얼굴을 한 학생 같은 외모지만 당대의 배우들을 사로잡은 당찬 감독이다. 이 영화는 미스터리 멜로의 감성을 잘 살린 깔끔한 시나리오라는 평가를 받았고 이미 촬영을 50%가량 넘기며 순항 중이다.

임순례 감독이 현장을 지휘하며 프로듀서를 맡았고 출연진이나 스태프들이 마음을 모아 만든 저예산 프로젝트 ‘미소’도 박경희 감독의 데뷔작이다. 어렵사리 촬영을 마치고 후반작업에 들어간 ‘미소’는 주연인 추상미의 열연을 기대해도 좋다는 소문이 조심스레 돈다.

▼올해는 현명한 여인들의 ‘영화 천하’ 되길 ▼

지난해 부산영화제의 조용한 화제작이자 개봉을 넉 달이나 남겨두었는데도 이미 팬들의 열광적인 찬사를 받고 있는 박찬옥 감독의 ‘질투는 나의 힘’은 물밑 홍보가 탄탄하게 되고 있어 개봉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남자의 시각으로 연애를 집중 탐닉하는 홍상수 감독에 대응할 수 있는 여성 감독의 탄생이라는 소문만으로도 흥미진진하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에 이어 이 영화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배우 박해일을 두고 충무로에서는 마치 보물을 발견한 듯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벌써부터 ‘국화꽃 향기’를 비롯, ‘살인의 추억’ ‘두 사람이다’ 등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는 그의 매력을 발견한 두 감독이 모두 여성이라는 것도 주목할 점이다.

여성감독들은 권력의 중심에 서기보다 영화의 본질에 큰 비중을 두고 있어 오히려 관객과 나누는 100분의 대화에 강한 설득력을 보여준다. 그래서 왜곡되지 않은 감성으로 솔직하게 말하는 여성 감독들의 영화는 더 많이 필요하다.

여자이기에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여자이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영화의 발전에 기여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들이 더 많이 등장해 여성감독이 아닌 영화감독으로 불리고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도 더욱 확대되길 기대한다.

남자도 하기 힘든 최초의 산악영화라든가 미스터리 영화를 만들고, 쿠엔틴 타란티노와 그의 친구들이 부럽지 않은 팀워크로 영화를 만들고 있는 여성감독들의 2003년은 이른바 현명한 여인들의 ‘영화천하’가 되지 않을까?

‘여성감독들에겐 말랑말랑한 로맨틱 코미디나 멜로가 제 격’이라는 선입견은 없어진지 오래다.

씨네월드 이사 amsaja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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