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리뷰]'그남자는 거기 없었다' 내 삶의 구경꾼이긴 싫다

  • 입력 2002년 4월 29일 17시 26분


영화는 ‘그 남자’의 낮게 깔린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나는 이발소에서 일하지만, 내가 이발사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어쩌다보니 이발사가 됐다. 아니, 결혼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결혼 역시, 만난 지 몇 주만에 여자의 청혼에 따라 이루어졌을 만큼 ‘그 남자’는 수동적인 인간이다.

미국 독립 영화의 선두주자인 조엘(감독)과 에단(제작) 코엔 형제의 신작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는 1940년대 미국 어느 작은 마을에 사는 지극히 수동적인 이발사 에드 크레인을 통해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굴러가는 거대한 수레바퀴 같은 삶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무료한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은 에드는 평생 단 한번, 자기 삶을 바꾸기 위해 적극적 결정을 내린다. 우연히 이발소에 들른 뜨내기 고객으로부터 ‘드라이 클리닝’에 대한 사업 구상을 듣고 여기에 1만달러를 투자해 동업하기로 한 것. 에드는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아내 도리스와 불륜 관계를 맺고 있는 도리스의 직장 상사 빅 데이브를 협박한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에드는 빅 데이브를 죽이고, 엉뚱하게 도리스가 살인범으로 지목되면서 영화는 계속 꼬여가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이 영화는 에드의 내레이션으로 전개되면서 에드를 자기 삶의 ‘방관자’의 위치에 놓는다.

에드 크레인역을 맡은 빌리 밥 손튼의 건조하고 무표정한 연기는 자신의 삶에서 소외된 무기력한 모습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모순으로 점철된 삶과 예상치 못한 상황 전개가 빚어내는 웃음은 씁쓸하지만 뼈가 있다. 어찌보면 거창한 주제지만 코엔 형제는 시종일관 가볍고 유머러스하게 끌고 나간다.

영화광이라면, 마지막까지 결말에 대한 호기심을 늦추지 못하게 하는 잘 짜여진 플롯의 정교함과 재치있는 대사보다도 1940년대 느낌을 물씬 풍기는 고전적인 흑백 화면(실제로는 컬러로 촬영해 흑백으로 처리)이 주는 우아함에 매료될 만하다.

지난해 칸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황금종려상과 감독상을 수상한 ‘바톤 핑크’(1991년)와 감독상을 수상한 ‘파고’(1996년)에 이어 코엔 형제에게 세 번째 칸 감독상을 안겨 준 작품이다.

도리스역의 프랜시스 맥도먼드는 조엘의 아내.

코엔 형제의 팬이라면, 빌리 밥 손튼을 좋아하는 영화광이라면 보고 싶을 영화. 서울 동숭동 하이퍼텍 나다에서 단관 개봉한다. 5월 3일 개봉. 18세 이상.

강수진기자 sjkang@donga.com

▣이 대사

〈진실을 왜곡하는 ‘유능한 변호사’인 프레디가 도리스의 변론을 위해 ‘불확정성의 논리’를 설명하면서.〉

프레디:독일의 프리츠인가 워너인가 하는 학자의 이론에 의하면, 어떤 현상을 과학적으로 테스트하려면 관찰을 해야 하는데, 관찰을 하면 관찰을 하는 행위 자체가 현상을 변화시킨다는 거죠. 그래서 현상의 실체를 알기가 불가능하다는 거지. 진실을 아는 건 불가능하다는 거죠. 이 이론을 ‘불확정성 원리’라고 하오. 내 말은 더 관찰할수록 더 모른다는 얘기요. 이건 입증된 사실이오. 어떻게 보면 이것이 유일한 진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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