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의 TV읽기]가요무대 - '세월의 주름' 잡힌 우리노래 역사

  • 입력 2001년 8월 22일 18시 30분


사람의 몸 중에서 가장 늦게 나이 먹는 부분은 목소리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특히 좋은 목청을 타고난 가수들은 웬만한 세월에도 까딱하지 않고 꼿꼿한 소리로 심금을 울린다. 뿐만 아니라 나이를 먹을수록 요즘 표현대로 ‘필이 좋아져’ 노래도 더욱 무르익게 된다. 그런 면에서 가수들은 운이 좋은 편이다. 연륜보다는 젊음과 미모가 우선인 다른 연예인들에 비해 훨씬 수명이 길고,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팬들도 따르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KBS1 TV의 ‘가요무대’(월 밤10시)를 볼 때마다 노래의 생명은 참으로 길고, 가수의 목청은 나이를 먹을 줄 모른다는 사실에 놀랄 때가 종종 있다. 늙은 가수들은 목소리가 건재한 한 ‘언제나 현역’이다. 수백 수천 번 불렀음직한 노래가 노련한 목청에서 늘 새롭게 태어난다. 한 시대를 풍미한 그 노래는 이미 노래의 범주를 벗어나 시대를 상징하는 하나의 아이콘이 되어 버렸다. 가수는 그 가운데서 시대를 노래하는, 일종의 ‘증언자’인 셈이다.

흘러간 노래들로 꾸며지는 ‘가요무대’는 그래서인지 지나간 시대를 대변하고, 단절을 이어주며, 그 속에서 한민족의 동질성을 확인시켜주는 독특한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은 것 같다. 새롭고 젊은것이 넘치는 TV에서 낡고 늙은 노래가 주를 이루는 가요무대가 있어 비로소 현재는 과거와 균형을 찾는다.

어떤 시인은 후각과 연결된 기억이 가장 오래간다고 했지만, 청각에도 그에 못지 않게 기억을 되살리는 특별한 장치가 있는 듯하다. 가요무대에서 기억에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가수의 노래가 나올 때면 “맞아, 저 가수도 있었지”라는 새삼스런 깨달음과 함께, 유치원 적 기억이라도 되살아나는 것 같아 반갑다. 기억하기로는 분명 볼이 통통했던 어떤 처녀 가수가 중년을 훌쩍 넘긴 아줌마가 되어 나온다. 신기할 정도로 세월이 비껴간 가수들도 있다. 세월을 감추려고 화장을 짙게 해 보지만, 목에 잡힌 주름은 감춰지지 않는다. 그래도 목소리는 여전히 젊다.

세대를 관통하는 그들의 노래 속에서, 세대는 단절된 것이 아니라 잠시 나뉘어진 구획에 불과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읽는다. 어느새 나는 노래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감상하고 있는 것이다.

외국에서 조금이라도 거주해본 사람에게 흘러간 노래는 떠나 온 조국과 동격이다. 해외 교포들은 한국 식품점에 비치되어 있는 ‘가요무대’ 비디오를 빌려보며 자신의 동질성을 확인하고, 고국 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사람들은 기내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있는 ‘가요무대’를 시청하며 고국 땅이 가까워졌음을 실감한다. 가요무대를 여는 “전국의 시청자 여러분, 그리고 해외동포 여러분”이라는 귀익은 진행자의 멘트는 그래서 빈말이 아니다.

모처럼 무대에 선 해묵은 가수들은 설렘과 긴장으로 한 곡 한 곡 정성스레 부른다. 대중의 사랑과 냉대를 두루 경험한 때문인지 매너는 정중하고 겸손하다. 그들은 영원히 가수로 기억될 이들이다. 필요하다면 노래도, 연기도, 개그도 마다 않는 요즘의 ‘만능 엔터네이너’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들의 해묵은 노래에는 대중을 심리적으로 안정시키는 힘이 있다. 기억이 배반당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그럼으로써 사람들 사이의 동질성을 일깨우는 프로그램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화여대 교수·언론홍보영상학부> shpark1@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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