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푸른 안개>,불륜의 음습함을 털어버린 연출 돋보여

  • 입력 2001년 4월 24일 13시 44분


KBS2의 주말극 <푸른 안개>(연출 표민수, 극본 이금림)는 참 말이 많은 드라마이다. 40대 중반 유부남과 20대 초반 여자와의 사랑이란 소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설까. 드라마는 방영 초부터 시청자들의 찬반 양론이 분분했다. 지금도 인터넷의 시청자 게시판에는 격한 어조로 드라마를 비판하는 의견과 옹호하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 방송된 줄거리만 놓고 본다면 그동안 언론으로부터 숱한 질타를 받았던 다른 드라마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현숙한 아내와 귀여운 딸, 중견업체의 사장이라는 사회적 위치.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 윤성재(이경영 분)는 이 땅의 남자들이 꿈꾸는 '성공한 40대'의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다. 그런 그가 딱 자기 나이 반밖에 안되는 이신우(이요원 분)와 사랑에 빠진다.

지난 22일 방송분에서 두 사람의 '위험한 사랑'은 윤성재의 아내 노경주(김미숙 분)에게 발각되면서 선택의 기로에 섰다. 비슷한 내용의 다른 드라마들이 보여준 행보를 감안하면 앞으로 드라마는 두 사람이 저지른 '잘못'을 '윤리적' 잣대에서 수습할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면 그렇다.

하지만 표면적인 줄거리와 소재가 그렇다고 해서 <푸른 안개>를 '통속 불륜 멜로'라고 간단하게 단정짓기는 어렵다. 쉽게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데는 드라마에서 불륜의 음습한 습기를 절묘하게 빼낸 표민수 PD의 연출력이 큰 이유를 차지한다.

그는 드라마 연출자로는 드물게 고정 팬을 가진 PD이다. 그가 연출한 작품들 <거짓말> <바보같은 사랑>은 시청률에서는 큰 실적을 거두지 못했어도 극적 완성도에서는 호평을 받았다.

표민수의 드라마는 우선 시각적으로 깔끔하다. 이런 류의 멜로물이 대개 감정 과잉이 된 대사로 극적 긴장감을 높이는데 반해 그는 대사보다는 정교하게 계산된 카메라 움직임으로 인물의 감정을 그려낸다. 화사하게 핀 벗꽃을 이용해 남편의 불륜을 알게 된 노경주의 처참한 심경을 그리는가 하면, 신우와 경주의 모습을 교차 편집해 한 남자를 중심에 두고 대립하는 두 여자의 심리를 그려낸다.

지난 22일 방송분에서 그의 연출 센스가 돋보였던 장면은 신우와 경주가 레스토랑에서 처음 만나는 신. 멋진 정장에 고급 악세서리를 단 경주와 찢어진 청바지에 흰 셔츠를 입은 신우가 마주 한다. 카메라는 마주 앉은 두 사람을 함께 잡다가 대화가 시작되면서 두 사람의 목에 걸린 목걸이, 입술의 립스틱을 번갈아 보여준다.

한쪽은 밝고 화사한 분홍색 립스틱을 살짝 바르고 간결한 디자인의 금 사슬 목걸이로 치장했다면 다른 쪽은 짙은 자주빛 립스틱에 얼핏 봐도 비싸보이는 세련된 디자인의 목걸이를 했다. 물질적인 잣대로 평가하면 도저히 비교가 안되지만 처량하게 보이는 쪽은 오히려 화려하게 꾸민 경주. 표민수 PD는 복잡한 설명없이 몇 번의 커팅과 부분 클로즈업으로 신우의 '젊음'에 절망하는 경주의 착잡한 속내를 그려냈다.

이런 시각적 특징 때문에 표민수를 감각적인 영상을 추구하는 스타일리스트로 평가한다. 하지만 <푸른 안개>만 보면 그는 인간 심리를 과장이나 미화없이 솔직하게 그려내는 리얼리스트이다.

<푸른 안개>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세 주인공, 성재와 신우 경주는 모두 삶의 한 부분이 비어 있는 사람들이다. 남들이 보기에 부러울 것이 없는 인생을 사는 성재. 일과 가족만 생각하며 정신없이 달려온 그는 더 이상 '젊지 않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그런 그에게 신우는 삶의 활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존재이다.

어린 시절 우상처럼 떠받들던 아버지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이후 신우에겐 늘 그 빈자리가 가슴 한 구석에 남아있다. 신우에게 성재는 아버지가 남기고 간 마음의 빈 공간을 채워주는 사람이다.

겉보기에 여유있고 평안한 삶을 살아온 경주는 과거의 사랑을 잊기 위해 서둘러 성재와 결혼했다. 17년의 결혼생활 동안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키스 한번 못해보고 3개월만에 결혼했다"는 극중 대사가 암시하듯 그녀의 결혼생활에는 뜨거움이나 절실함이 없다. 갑작스런 남편의 외도에서 그녀는 자신의 결혼생활에 부족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느낀다.

<푸른 안개>의 작가 이금림은 이런 세 사람의 내면을 그리면서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균등한 극적 비중을 인물들에게 주고 있다. 여기서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은 드라마의 시간적인 배려 뿐만 아니라, 정서적 심리적인 균형도 포함된다. 양쪽을 흑백 논리로 갈라놓지도 않고, 어느 한 쪽을 원인제공자로 매도하거나 몰아붙이지도 않는다. 다만 서로 자신의 삶에서 절실한 무엇을 찾으면서 부딪치고 아파하는 것을 차분히 그리고 있다.

이 드라마가 기존 드라마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불륜'이란 상황을 여자가 아닌 남자의 입장에서 풀어간다는 점이다. <미워도 다시 한번> 이후 최루성 멜로물이나 불륜, 삼각관계에서 갈등의 당사자는 늘 여성이었다. 그것이 남편의 배신을 발견한 아내이든, 아니면 유부남과의 사랑에 빠진 젊은 여자이든 이야기를 풀어가는 주체는 여자였다. 그런데 <푸른 안개>에서 흐름의 맥을 쥐고 있는 것은 윤성재이다.

아무 문제없는 가정에 평지풍파가 일어날 것을 뻔히 알면서 신우와 사랑에 빠지는 것도 그의 선택이고, 이후 벌어지는 온갖 사건도 성재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다. 어찌 보면 이 드라마는 사랑의 절실함보다는 한 남자가 인생의 황금기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과정을 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김탁환 교수가 자신의 칼럼에서 말한 '중독된 사랑'일수도 있고, 또는 잊고 살았던 인생의 순수함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새로움을 발견하면서도 솔직히 <푸른 안개>를 그 의도만큼 순수하게 바라볼 수가 없다. 앞에서 언급했듯 10대 청소년의 '원조교제' 보도가 마치 교통사고 뉴스처럼 자주 등장하는 사회의 현실이 이 드라마를 아무 편견없이 접하기 어렵게 한다. 또 누구나 볼 수 있는 TV에서, 민방도 아닌 공영방송 KBS에서, 온가족이 TV 앞에 모여있을 밤 8시에 방송된다는 점이 드라마에 대한 우려와 비판을 낳게 한다.

공들여 깔끔하게 만들어진 드라마 한 편을 속 편히 볼 수 없는 우리네 현실. 드라마보다 더 서글프고 답답한 모습이다.

김재범 <동아닷컴 기자> oldfie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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