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물고기」감독 이창동]문단서 건진 「충무로 대어」

  • 입력 1997년 10월 17일 08시 08분


「초록물고기」
「초록물고기」
올들어 한국영화계에서 이창동(43)만큼 주목받은 감독도 없다. 지난 2월 그의 데뷔작 「초록물고기」가 선보였을 때 충무로는 발칵 뒤집히다시피 했다. 객석에는 감동이 일었고 평론가와 언론들은 찬사를 쏟아냈다. 박수 행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 12일 폐막된 제16회 밴쿠버 국제영화제에서 「초록물고기」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다른 작품들을 제치고 「용호상(The Alcan Dragons & Tigers Award)」을 수상했다. 4일 무주에서 열린 제35회 대종상 영화축제 시상식에서도 남녀주연상 심사위원특별상 등 5개 부문을 휩쓸었다. 이 작품은 18일 막을 내리는 제2회 부산영화제에서도 경쟁부문인 「뉴커런츠」에 올라 있으며 다음달 열리는 런던 영화제와 그리스의 테살로니키 국제영화제에도 출품될 예정이다. 물고기처럼 싱싱한 스물여섯의 청춘 막동이(한석규 분)를 중심으로 밑바닥 인생들의 꿈과 좌절을 그린 「초록물고기」는 스토리와 형식만 보면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작품이다. 개발과 경제발전 속에 어쩔 수 없이 「잃어버린 것들」을 누아르와 삼각관계의 틀을 빌려 그려낸 이 작품은 요즘 영화계의 새로운 흐름과 동떨어진, 고전 영화의 관습을 그대로 밟아간다. 그런데도 국내외에서 폭넓은 공감을 얻는 이유는 무엇인가. 영화평론가 강한섭교수(서울예전)는 이미지와 감각에 치우친 요즘 영화가 갖고 있지 못한 「깊이와 힘」을 「초록물고기」의 강점으로 꼽는다. 소설가이기도 한 이감독이 직접 쓴 시나리오는 최근 한국영화의 아킬레스건인 극적 구조의 취약함을 극복했다. 풍부한 복선과 단단한 짜임새가 절제된 연출과 어울려 커다란 울림을 주는 것이다. 중견 소설가의 심심풀이 「충무로 외도」쯤으로 여겼던 영화가의 놀라움은 작지 않았다. 작가의 감독 데뷔는 김승옥 최인호씨의 경우에서 보듯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그러나 번번이 영화와 소설은 엄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시키곤 했다. 나이 마흔에 「그 섬에 가고 싶다」 조감독으로 영화에 뛰어든 이창동감독도 『소설 소재를 얻으려는 것이겠지』하는 주변의 눈총을 받았었다. 그러나 각본과 연출 촬영 연기 등 모든 면에서 수준급인 작품이 「터지자」 영화의 전문성을 자부해온 충무로는 경악했다. 심지어 『기성 감독들이 얼마나 시원찮으면 문단에서 차세대를 빛낼 영화감독이 나오느냐』는 장탄식까지 나왔다. 이감독 자신의 의지도 남다르다. 『소설은 언제라도 쓸 수 있지만 영화는 할 수 있을 때 해야한다』며 당분간 영화에 집중하겠다는 것. 그는 고향인 대구에서 활동하는 형 이필동씨(연극연출가)를 따라 연극 연출과 연기 수업, 시나리오 작성 등 나름대로 오랫동안 영화에 필요한 수업을 받아왔음을 강조한다. 이감독의 출현이 예사롭지 않은 것도 이때문이다. 데뷔작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감독은 근래에도 몇 있었지만 데뷔작이 곧 은퇴작이 되는 것이 한국영화계 현실이었다. 그러나 이감독은 오랫동안 여러 분야에서 예술적 기초를 다져왔다는 점, 유행을 좇기보다 전통에 충실한 연출 스타일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다음 작품이 더욱 기대되는 작가다. 이감독은 『테크닉에 집착할 생각은 없다. 짐 자무쉬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처럼 가장 낡은 것 같으면서 본질적으로 새로운 영화를 하겠다』고 말했다. 형사를 주인공으로 한 「박하사탕」(가제)이란 두번째 작품을 구상중이다. 이야기꾼으로서 그의 자질과 문학적 상상력이 한국영화계에 새로운 영감을 주는 원천이 되기를 충무로는 기대하고 있다. 〈신연수기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