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류업’ 정책 발맞춰, 기업들 자사주 소각 바람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2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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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이노, 8000억규모 소각 결의
기아-삼성물산 등도 계획 밝혀
“주주가치 제고에 긍정적 영향”
일부선 “경영권 악영향” 우려도

SK이노베이션이 2011년 창립 이래 처음으로 8000억 원에 육박하는 규모의 자사주를 소각한다. 정부가 기업 주주가치를 높이기 위해 최근 발표한 ‘밸류업’ 정책에 발맞춰 주요 대기업들과 금융지주가 잇달아 자사주 소각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국내 증시의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에 기여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지만, 재계에선 기업들의 경영권이 약화되고 기술 개발 및 투자에 활용해야 할 재원이 자사주 매입에 쓰일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6일 SK이노베이션은 전날 이사회를 열어 자사주 492만 주를 소각하기로 결의했다고 밝혔다. 장부가 기준 약 7936억 원 규모로 소각 예정일은 20일이다. SK이노베이션이 자사주를 활용한 주주 환원 정책에 나선 것은 2018년 5월 자사주 1조 원 매입 이후 약 6년 만이다. 특히 자사주 소각은 2011년 출범 이후 처음이다.

앞서 지난달 25일 기아도 올해 5000억 원 규모의 자사주를 취득한 뒤 50%를 소각하고, 3분기(7∼9월) 누계 기준 재무 목표를 달성하면 4분기(10∼12월) 50%를 추가 소각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삼성물산은 지난달 31일 7677억 원 규모 자사주 소각 계획과 함께, 총 1조 원 규모의 자사주 전량 소각 기간을 2026년까지로 기존 대비 2년 앞당겼다. 이 외에도 DL이앤씨(1083억 원), HD현대인프라코어(560억 원), 현대백화점그룹 계열사 지누스(전체의 2.3% 규모) 등이 대규모 자사주 소각을 결정했다.

금융권도 연이어 자사주 소각을 통한 주주 환원에 나서고 있다. 6일 우리금융지주는 실적 발표에서 연내 매입 예정인 1364억 원 상당의 예금보험공사 소유 잔여 지분을 전량 소각하겠다고 밝혔다. 우리금융 측은 “전년 대비 30% 이상 증가한 자사주 매입 규모”라고 설명했다. 하나금융지주 역시 지난달 31일 연내 3000억 원 규모의 자사주 소각을 결정했다.

자사주 소각 계획을 밝힌 기업들의 주가는 대체로 발표 직후 급등한 뒤 시일이 지나며 진정되는 모양새다. 강소현 자본시장연구원 자본시장실장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부족한 주주 환원이 꼽히는 만큼 주가에 긍정적인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이 같은 흐름이 단기간의 증시 부양에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기업 경영권 보호와 미래 투자 여력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자사주 자체로는 의결권이 없지만 자사주를 백기사(우호 주주)에게 매각하면 의결권이 되살아난다. 이 때문에 기업들은 자사주를 유사시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활용해 왔다. 2015년 삼성물산은 엘리엇 사태 때 자사주 5.8%를 우호세력인 KCC에 넘겨 승리했으며, 2003년 SK는 소버린 사태 당시 자사주 6.2%를 신한은행과 하나은행 등에 매각해 경영권을 지켰다.

정우용 한국상장회사협의회 정책부회장은 “자금 여력이 충분한 기업이 주주 환원 취지에서 자사주를 소각한다면 주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현금 유동성이 줄어들거나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대한 방어 수단이 사라질 수 있다”며 “경영권이 불안해지면 결국 주주들에게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설명했다.

재계에서는 밸류업 프로그램과 함께 ‘포이즌필’(적대적 M&A 시 기존 주주들에게 시가보다 싼 가격에 지분을 매입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과 같은 경영권 방어 제도 도입이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경영권 방어 제도 도입 없이 기업들의 자사주 소각을 우선적으로 앞세우는 것은 우려할 만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곽도영 기자 now@donga.com
김수연 기자 syeon@donga.com
#밸류업#자사주 소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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