싹둑 잘린 원전예산 82%가 중소-중견기업 ‘생명줄’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1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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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생태계 붕괴 우려” 목소리

나다는 경기 성남시의 원자력발전소 진동감시시스템 제작업체다. 이해철 나다 대표는 최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에서 원전 예산 1814억 원이 삭감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3년 전 겪었던 ‘생고생’이 생각났다. 이 기업은 당시 튀르키예로부터 300만 달러(약 40억 원) 상당의 계약을 따냈다. 발주사는 한국의 작은 기업을 믿고 계약금을 보내주기 어렵다며 수출보증 가입을 요구했다. 그런데 전년도 수출 실적이 없다는 이유로 정부 기관에서 수출보증을 받지 못했다. 결국 2년이 흐른 지난해 민간기관인 SGI서울보증에 4000만 원을 내고 수출보증보험을 가입했다. 대출로 원자재를 구매하며 버티다가 계약금이 들어와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이 대표는 “내년 1월에 이집트에서도 원전 부품 본입찰이 있는데 현재로선 일감을 따내도 걱정”이라며 “수출보증 예산이 삭감됐다던데 정부 지원 없이 또 어떻게 자금을 마련해 납품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26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산자위에서 삭감된 원전 예산 1814억 원의 대부분은 중소·중견기업이 지원 대상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삭감된 예산의 세부 항목을 살펴보면 ‘원전 생태계 금융 지원’(1000억 원), ‘원전 수출보증 지원’(250억 원), ‘원자력 생태계 지원’(112억 원), ‘원전 기자재 선금 보증보험 지원’(57억9000만 원), ‘소형모듈원전(SMR) 제작지원센터 구축’(1억 원) 등이다. 오로지 중소·중견기업만을 대상으로 하는 지원 예산이 총 1420억9000만 원(78.3%)에 달하는 것이다. 여기에 중소기업부터 대기업까지 모든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원전 첨단 제조기술 개발 지원’(60억 원) 예산까지 합치면 중소·중견기업 관련 예산은 1480억9000만 원(81.7%)이었다.

이 예산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중소·중견 원전기업들은 패닉에 빠졌다. 그중 가장 큰 비중(55.1%)을 차지한 저금리 융자 지원 삭감이 가장 치명타다. 해당 예산은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 때문에 일감 부족에 시달리던 기업들이 재기할 수 있도록 우수 업체를 선발해 사업 자금을 싼 이율로 지원해주는 ‘마중물’ 같은 사업이었다.

업계 관계자는 “중소·중견기업의 경우에는 지금 당장 큰 수익을 낼 수 없어 일단은 정부 예산을 지원 받아 체력을 길러야 한다”며 “보조 없이 혹한기를 버텨낼 수 있는 기업은 몇 안 된다”고 말했다.

‘수출길’이 사실상 막힐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 정부 예산안대로 250억 원의 수출보증 지원금이 마련되면 한국무역보험공사에서는 해당 기금을 활용해 원전 기업을 도울 수 있었다. 수출보증을 가입해야 원청으로부터 계약금을 받고, 그 자금으로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영세 기업들의 어려운 사정을 고려한 예산이다. 나다 같은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원전 생태계의 미래 역량도 타격을 입을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원전 기업들이 SMR을 개발하거나 인력 양성을 할 때 들어가는 예산이 함께 삭감됐기 때문이다. 경남 창원시의 원자력 부품 회사 대표 A 씨는 “SMR 부품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특수 전용설비를 따로 마련을 해야 하는데 중소기업이 그런 것까지 자체 개발해서 보유하는 건 힘들다”라면서 “정부에서 지원을 해줘야 어느 정도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또 다른 업체 관계자는 “원전 중소·중견기업들이 인턴을 고용하거나 퇴직자에 대한 재고용을 추진할 때 보조해주던 생태계 지원 예산이 이번에 함께 삭감됐다”며 “지난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외부로 이탈한 인력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유도하는 예산이 삭감되니 눈앞이 캄캄하다”고 걱정했다.

업계에서는 원전 산업이 다시 암흑기로 돌아갈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원전 검사 업체인 금화PSC 이강덕 전무는 “이미 끝낸 사업에 대해서도 한국수력원자력으로부터 대금을 못 받고 있다”며 “예산이 삭감돼 원전 생태계가 침체된다면 앞으로 상황이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한국원자력학회장)는 “작은 기업들이 건강해야 원전 생태계가 유지되는 것”이라며 “‘탈원전’이란 중병을 앓았던 기업들이 다시 상처를 입게 될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최성민 KAIST 원자력및양자공학과 교수는 “이번 예산 삭감은 원전 산업 생태계를 복원하지 말라는 것과 같은 의미”라며 “중소·중견기업들에는 가뭄의 단비 같았던 예산이 삭감된 것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재희 기자 hee@donga.com
#원전예산#원전 생태계 붕괴#sm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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