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대출자 175만명… ‘소득<원리금 상환액’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7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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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대출자 1977만명의 8.9%
소득 70%이상 상환은 300만명
연체율도 증가… “금융부실 우려”

조선소 현장에서 일하는 한모 씨(27)는 2018년 생활비 목적으로 한 인터넷 전문은행에서 300만 원을 빌렸다. 그것만으로는 생활비가 부족했던 한 씨는 또 다른 대출을 알아보던 중에 보이스피싱을 당해 지난해 6월 대출액이 2700만 원까지 불어났다. 한 씨는 “설상가상으로 대출 금리마저 오르면서 월 소득 280만 원 중에 120만 원을 빚 갚는 데 쓰고 있다”며 “잔업과 특근을 몰아 하며 근근이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

팬데믹 시기에 급격히 불어난 빚을 갚느라 최소한의 생계도 이어 나가기 어려운 이들이 300만 명에 육박했다. 이 중 175만 명은 소득을 모두 쏟아부어도 원리금 상환액을 갚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가계대출 연체율이 오르면서 금융 불안이 커지는 가운데 허리띠를 졸라맬 수밖에 없는 소비 상황에 하반기(7∼12월) 경기 회복이 더욱 지연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2일 한국은행이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양경숙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3월 말 기준 국내 가계대출자 수는 1977만 명, 대출 잔액은 1845조3000억 원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말보다 대출자 수와 대출 잔액이 4만 명, 15조5000억 원 줄었지만 감소율은 각각 0.2%, 0.8%에 불과했다.

전체 대출자의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은 40.3%로 나타났다. 올해 1분기(1∼3월) 말 기준 국내 가계대출자들은 평균적으로 연 소득의 약 40%를 빚 갚는 데 써야 한다는 뜻이다. 특히 가계대출자 175만 명은 원리금 상환액이 소득과 같거나 더 많았다. DSR이 100%를 넘는 이들은 전체 대출자의 8.9%로 2020년 3분기(7∼9월·7.6%) 이후 늘어나는 추세다.

DSR 70% 이상 구간을 포함한 대출자 수는 299만 명까지 늘어난다. 통상 당국과 금융기관 등은 DSR이 70%를 넘어서면 최저 생계비를 제외한 소득의 대부분을 원리금 상환에 투입해야 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약 300만 명에 달하는 대출자들이 빚을 갚느라 생계에 곤란을 느끼고 있는 셈이다. 이들이 받은 대출이 전체 대출 잔액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41.4%에 달한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DSR이 늘수록 소비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며 “취약계층을 중심으로 연체율이 높아지면 금융 시스템의 부실 우려가 커지고 취약 부분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재정 부담도 커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 소액대출 요건 까다로워”… 취약층, 시민단체에 급전 SOS


대출 상환 허덕이는 서민
대부업체들, 연체율 급증에 빗장… 올 신규대출 작년 4분의 1로 ‘뚝’
시민단체 대출은 1년새 32% 늘어… “저소득-저신용자 소액 지원 시급”

고금리와 경기 둔화 여파는 저소득·저신용의 취약계층에 더 가혹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은에 따르면 올해 3월 말 기준 3개 이상 금융기관에서 대출받은 다중채무자의 DSR은 62.0%다. 소득의 60% 이상을 빚 갚는 데 쓰고 있는 셈이다.

다중채무자면서 저소득(소득 하위 30%)이거나 저신용(신용점수 664점 이하)인 취약 차주의 DSR은 67.0%에 달한다. 취약 차주 DSR은 1인당 평균 대출 잔액이 지난해 말 7474만 원에서 7582만 원으로 늘면서 0.4%포인트 늘었다.

벌어들이는 돈으로 대출 원리금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들이 늘자 연체율도 치솟고 있다. 한은이 발표한 ‘금융안정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3월 말 가계대출 연체율은 은행 0.31%, 비은행금융기관 1.76%로 지난해 하반기 이후 전 금융권에서 상승하는 추세를 보인다. 한은은 “지난해 하반기 신규 연체 잔액의 62.8%가 취약 대출자로부터 발생했다”며 “가계대출 연체가 예상보다 빠르게 늘어날 수 있으므로 금융기관들의 자본 확충과 정부·감독 당국의 신규 연체채권 추이에 대한 모니터링 강화가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제도권 금융의 마지막 보루인 대부업체 연체율은 이미 10%를 웃돈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오기형 민주당 의원이 한국대부금융협회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5월 기준 대형 대부업체 25곳의 연체율은 11.5%로 집계됐다. 대부업 연체율은 1년 전(6.7%)보다 4.8%포인트 올랐고 올해 1월(8.7%)과 비교하면 2.8%포인트 급등했다.

연체율이 치솟은 데다 법정 최고금리 인하로 수익성 악화에 시달리는 대부업체들은 대출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다. 보험설계사로 일하다 코로나19 이후 일감이 끊긴 오모 씨(41)는 올해 4월 대부업체에 대출을 문의했지만 ‘내구제대출’로만 대출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내구제대출은 ‘나를 구제하는 대출’의 줄임말로, 본인 명의 휴대전화를 개통해 넘기고 현금을 받는 불법 사금융이다. 이미 지난해 100만 원의 사채를 썼다가 일주일 만에 120만 원을 갚아 본 적 있는 그는 결국 발길을 돌렸다.

실제로 올 5월까지 대부업 상위 69곳이 신규 취급한 대출은 957억 원으로 1년 전(4298억 원)보다 급감했다. 이 기간 신규 대출 이용자도 3만1274명에서 1만2737명으로 줄었다. 경기 시흥에 사는 문모 씨(32)도 지난달 대부업체에서 생활비를 대출받으려다 연체 이력을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는 7년간 은행 경비원으로 일하다 우울증과 허리디스크로 올 초 일을 그만뒀다. 퇴직금으로 밀린 신용대출을 갚은 뒤 아버지의 고철 장사를 도와 생활비를 마련하고 있지만 병원비와 약값이 늘 수입을 넘어섰다. 그는 “사채까지 알아보다가 시민단체를 통해 급한 생활비를 빌렸다”고 말했다.

문 씨처럼 급전이 필요한 취약계층은 비영리단체에까지 몰리고 있다. 무이자, 무담보 소액 대출로 취약계층의 자립을 돕는 시민단체 ‘더불어사는사람들’에 따르면 지난해 이 단체에서 빌려준 돈은 4억9085만 원으로 1년 전(3억7164만 원)보다 32% 늘었다.

대부업에서도 밀려난 취약계층을 위해 정부가 소액생계비대출과 같은 서민금융상품을 내놓고 있지만 이 역시 사각지대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초생활수급비로 생활하며 고2 자녀를 홀로 키우는 서모 씨(62)는 최근 아이의 교복이 작아져 교복 구입을 위해 소액생계비대출을 문의했지만 거절당했다. 서 씨의 신용도가 높다는 이유에서였다. 서 씨는 “소아마비로 일할 수 없는 처지라 다른 서민금융상품도 이용할 수 없다. 나 같은 사람들은 급전이 필요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김수연 기자 syeon@donga.com
송혜미 기자 1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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