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투기자본 사냥터 될텐데…” 다시 커진 상법개정안 공포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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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현대車 압박’의 이면

엘리엇이 현대자동차를 상대로 경영개입 가능성을 비친 다음 날인 5일, 국내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벌처(대머리 독수리) 펀드’로 불리는 투기자본이 경영권 방어에 취약한 한국 기업을 골라 노린다는 비판이 많았다. 최종학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엘리엇 같은 헤지펀드는 ‘주주가치 향상’이라고 그럴듯하게 포장하지만 늘 본질은 돈을 버는 것이다. 현대차 지분도 차명계좌를 통해 훨씬 더 많이 들고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가운데 정부와 정치권은 투기자본에 악용될 수 있는 제도 도입을 무더기로 추진하고 있다는 게 재계 시각이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상법개정안 얘기다. 전문가들은 소액 주주들의 권한을 강화한다는 취지와 달리 한국 경제가 외국 투기자본의 ‘사냥터’로 전락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가뜩이나 경영권 방어에 취약한 한국 기업을 상대로 외국 투기자본이 더욱 활개 칠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주고 있다는 것이다.

유정주 한국경제연구원 기업혁신팀장은 “상법개정안에 담긴 집중투표제와 감사위원 분리선출제가 시행되면 한국 기업 이사회나 감사실에 외국 투기자본 인사들이 들어오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 했다.

○ 헤지펀드 인사가 기업 좌지우지

집중투표제란 주주총회에서 이사를 선임할 때 ‘1주 1표’가 아니라 선임될 이사 수만큼 표를 행사하는 제도다. 가령 4명을 선임할 때 기존에는 각 이사에 대해 찬반 여부를 묻는 1표를 행사한다. 집중투표제에서는 이사 수만큼인 4표를 특정인에게 몰아주는 게 가능해진다. 이렇게 되면 지분이 적은 헤지펀드라도 해외 기관투자가들과 손잡고 특정 후보에 몰표를 던져 이사회 입성이 가능해진다. 이런 식으로 한 명만 이사회에 진입시켜도 사업계획, 투자계획, 구조조정 등 경영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소액주주 권리를 강화해주는 효과보다 기관투자가에게 악용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게 재계의 우려다.

감사위원 분리선출제는 감사위원을 뽑을 때 대주주 의결권을 3%로 제한하는 제도다. 가령 오너나 경영자가 지분 10%를 보유해도 의결권은 3%만큼만 행사할 수 있다. 헤지펀드 여러 곳이 손잡으면 간단히 한국 대주주 의결권을 넘어설 수 있다. 집중투표제보다 악용 소지가 더 높다고 보는 이유다.

특히 감사위원은 기업의 내밀한 정보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자리다. 한 기업 관계자는 “엘리엇 쪽 인사가 삼성전자 반도체 기밀이나 투자계획, 현대차의 미래차 개발계획을 들여다본다고 생각해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기업 약점을 헤지펀드에 넘겨 소송전으로 몰고 갈 가능성도 농후하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한국경제연구원이 국내 주요 기업 지분구조를 연구한 결과 집중투표제가 도입되면 삼성전자, 현대차, 기아차, 현대모비스에 헤지펀드 진영 이사가 충분히 선임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감사위원 분리선출제가 도입되면 삼성전자, 현대차, LG전자, 기아차, SK이노베이션, 현대모비스에 헤지펀드 측 감사위원이 선출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취지 좋아도 악용 가능성 다분”

도입을 추진하는 다중대표소송제에 대한 우려도 높다. 다중대표소송제는 지주사나 모(母)기업 주주가 계열사 임원들을 소송으로 추궁할 수 있는 제도다. 가령 엘리엇이 ㈜LG 주식을 가졌다면 LG 계열사들을 상대로 소송전을 벌일 수 있다. 재계 관계자는 “외국인 이사, 감사위원이 외국 투기자본에 기업의 정보를 넘기고 이를 다중대표소송에 이용하는 시나리오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했다.

국민연금이 도입을 추진하는 스튜어드십 코드 역시 주주의 이익을 위해 기관투자가가 적극적으로 권리를 행사하자는 취지지만 악용 우려가 크다. 엘리엇이 주주 이익이란 명분을 내세우면 국민연금도 스튜어드십 코드에 따라 한국 기업을 공격하는 방향으로 의결권을 행사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릴 수 있다는 것이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자본시장실장은 “스튜어드십 코드는 주주 이익과 주주가치 추구를 최우선으로 두는데 엘리엇도 같은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만약 이번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의 분할합병에서도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다면 국민연금이 엘리엇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해외 자본의 경영권 개입 여지는 커지는데, 이를 방어할 수단은 적다는 게 재계의 고민이다. 설립자나 경영진에 더 많은 의결권을 주는 차등의결권 제도는 경영권 방어에 효과적인 수단이어서 미국이나 유럽, 일본에서는 제도화돼 있지만 한국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그간 한국 기업의 과오가 재벌개혁을 자초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점점 규모가 커지는 해외 투기자본 공격에 오히려 취약해지도록 제도를 바꾸는 게 국익 차원에서 과연 바람직한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 차등의결권 제도 ::

기업의 대주주나 설립자, 경영진에게 보유 지분보다 더 많은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제도. 주로 기업의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인다.

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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