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선미]‘소원을 말해봐’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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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 소비자경제부 차장
김선미 소비자경제부 차장
지난 토요일 서울 예술의전당 내 한 카페에 갔다. 빈자리에 앉고 보니 바로 옆에 크리스마스트리가 있었다. 손 글씨로 쓴 하트 모양 분홍색 포스트잇이 수백 장 붙은, 이른바 ‘소원 트리’였다. ‘소원을 이루어주는 소원 트리. 2016년 소원을 적어 보세요. 꼭 이루어질 거예요.’

물끄러미 각각의 사연을 읽어보았다.

‘지금보다 좋은 직장에서 대우 받고 다닐 수 있게 해 주세요. 비정규직, 일용직 말고요.’

‘돈 많이 벌게 해주세요.’

‘우리 엄마 일을 줄여 주세요.’

‘아빠랑 같이 살게 해 주세요.’

눈물이 날 뻔했다. 그것은 내 이야기, 내 가족과 친구, 이웃의 이야기였다. 가슴이 먹먹해져서인지 주문한 카페라테의 하트 거품이 왠지 홀쭉해 보였다.

글로벌 신용평가사인 무디스가 한국의 국가 신용등급을 사상 최고로 올렸지만 외환위기 때만큼이나 칼바람이 분다. 청년층도 희망퇴직에 내몰린다. ‘부동산 띄우기’를 믿고 빚냈던 가계들은 마이너스 통장 한도까지 꽉 찼다. 빚 부담이 큰 고령층과 자영업자는 더 힘겹다. 소비를 안 하는 게 문제라는데 소비를 할 흥이, 힘이, 돈이 없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전국 지역상의 회장단에게 ‘2016년 하면 떠오르는 것’을 물었더니 저성장 뉴 노멀 시대의 혁신 압박, 위험관리, 무한 경쟁이란 답들과 함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의 신뢰 구축이 나왔다.

신뢰를 생각해본다. 나의 초등학생 딸은 이번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매일 산타 할아버지에게 받고 싶은 선물을 ‘아뢰는’ 편지를 쓴다. 그러면서 요즘 집안일도 곧잘 돕는다. 착한 일을 하면 산타 할아버지가 꼭 선물을 가져다준다고 굳게 믿는다.

노력하면 보상이 따른다는 희망이 있어야 소원도 품는 법이다. 공정 경쟁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경쟁을 포기하게 된다. 공정하지 않다고 믿어 버리면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진실이 되고 만다. 남 탓을 정당화한다. 소원도 무의미해진다.

우리는 주로 높은 곳을 올려보면서 소원을 빈다. 달을 볼 때도, 타워를 볼 때도 있다. 오늘 마침 서울 잠실 제2롯데월드 123층 상량식이 열린다.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평생 염원이 담긴, 건국 이래 가장 높은 건물(555m)이다.

올해 롯데의 경영권 분쟁은 참으로 한심한 일이었지만, 롯데면세점 월드타워점 특허를 정부가 최근 재승인하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재승인하지 않은 이유라도 알려줘야 한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동안 도쿄 롯폰기힐스(2003년 개장한 복합문화단지)에는 관광객이 꾸준히 몰렸다. 우리는 123층 제2롯데월드 몰을 짓고 있으면서 스스로 ‘면세 쇼핑’이라는 관광 상품성을 버렸다. 동시에 1200명의 일자리도 날렸다. 이들에게 재취업이라는 소원만 남긴 채. 면세점을 둘러싼 규제는 한국 소비자를 봉으로 여기는 해외 명품의 콧대만 더 높였다.

정치가 경제를 이긴 걸까. 글쎄. 역사는 결국 잘한 정치보다 잘한 경제를 기억해 왔다. 한국 경제는 경쟁 상대를 아직도 나라 안에서만 찾는 ‘우물 안 개구리’인가. 고도성장에 따른 불균형은 손쉬운 규제로만 해결하려고 한다. 촌스럽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소원 열매를 다는 걸 보면 여전히 ‘살 만한 세상’이라는 희망을, 최소한 ‘살아보자’는 의지를 갖고 있는 것 같다. 어제 경제부총리를 포함한 일부 장관이 새로 지명됐다. 그들이 이 애절한 마음들을 살펴보기를. 새해엔 정부가 국민을 향해 ‘소원을 말해봐’라고 희망을 줄 수 있기를. 그렇게 내 소원을 빈다.

김선미 소비자경제부 차장 kimsunmi@donga.com
#크리스마스#면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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