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탄생 100주년]그의 도전, 기업가정신을 불러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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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정주영 명예회장 탄생 100주년, 아산정신을 기린다

1930년대 초 동생 정순영 전 성우그룹 명예회장(가운데) 등과 함께 선 아산(오른쪽).
1930년대 초 동생 정순영 전 성우그룹 명예회장(가운데) 등과 함께 선 아산(오른쪽).
1965년경 정주영 명예회장이 충북 단양 현대시멘트 공장에서 사원들과 함께 있는 모습.
1965년경 정주영 명예회장이 충북 단양 현대시멘트 공장에서 사원들과 함께 있는 모습.
1976년 6월 정주영 명예회장이 주베일 산업항 공사계약을 체결한 다음 사우디아라비아 나와프 왕자와 환하게 웃고 있다.
1976년 6월 정주영 명예회장이 주베일 산업항 공사계약을 체결한 다음 사우디아라비아 나와프 왕자와 환하게 웃고 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 막노동꾼. 쌀집 배달원. 재계 1위 그룹의 회장. 부유한 노동자.’

오늘날의 범현대가를 만든 아산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명예회장)의 인생을 상징하는 말들이다. ‘이봐, 해봤어’라는 어록으로 대표되는 아산의 기업가정신은 ‘아산 탄생 100주년’을 맞은 2015년, 모든 것이 풍요로워지고 저성장이 고착화되면서 기업가정신이 사라진 한국 경제의 롤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경제 산업계의 전문가들은 미국과 중국은 끊임없이 도전하는 창업가들이 경제를 이끄는 데 비해 한국은 기존 기업은 ‘대기업병’에 걸리고 창업자들은 단기적 성과에만 집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경제가 새롭게 도약하려면 아산의 기업가정신을 다시 불러내야 하는 이유다.



도전의 불씨

아산은 1915년 11월 25일 강원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가난한 농부의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식 교육은 소학교 졸업이 전부였다. 어린 아산은 동아일보에 연재되던 춘원의 소설 ‘흙’에서 “뒷간에 사는 쥐는 똥을 먹고 살고, 곳간에 사는 쥐는 쌀을 먹고 산다”라는 구절을 새기며 4번의 가출 끝에 서울로 상경해 막노동꾼을 거쳐 쌀집에 취직했다.

아산은 고향을 떠난 지 4년 만인 1938년, 일하던 쌀가게를 인수하고 ‘경일상회’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일제가 쌀 배급제를 실시하자 가게 문을 닫아야 했던 아산은 1940년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수리소를 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강제합병되며 문을 닫았다. 아산은 1946년 현대그룹의 모태가 된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차렸다. 1950년 현대토건사와 합병해 현대건설을 세우면서 ‘아산의 시대’를 열었다.

아산은 주변 만류에도 불구하고 모험을 선택하는 승부사 기질로 기업을 키웠다. 사람들은 그를 ‘불도저’라고 했지만 사실은 ‘긍정가’에 가까웠다. 아산은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에서 “어떤 일을 시작하든 반드시 된다는 확신 90%에 되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 10%로 100%를 채우지, 안 될 수도 있다는 회의나 불안은 1%도 끼워 넣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실패를 기회로

정진홍 아산나눔재단 이사장은 “아산은 실패는 시련이라고 했고 성공은 성취라고 하며 쉽게 꺾이거나 거만하지 않았다”며 “실패의 요인은 철저히 자기 자신에게서 찾으며 이를 되새겼다”고 말했다.

실제로 아산은 사업 초기 숱한 실패를 겪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기회의 밑거름으로 삼았다. 1953년 수주한 고령교 사업이 대표적이다. 아산은 전쟁 후 막대한 인플레이션을 예측하지 못했다. 1953년 40환이던 쌀 1가마니 가격이 공사를 마무리한 1955년 4000환으로 오를 정도였다. 노임을 주지 못하자 공사장 인부들은 파업을 했고 매일 빚쟁이들이 들이닥쳤다. 주변에서 공사를 중단하자고 했지만 아산은 “사업가는 신용을 잃으면 끝”이라며 아우와 매제의 집까지 팔아가며 사업을 마쳤다. 결국 아산은 5478만 환짜리 공사에서 6500만 환의 적자를 봤다. 그러나 내무부가 현대건설의 신용을 높이 평가하면서 아산은 1957년 2억3000만 환 규모의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를 수주할 수 있었다.

1965년 태국 빠따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도 마찬가지다. 당시 공사비 522만 달러(당시 환율로 약 14억9700만 원)짜리였던 이 공사는 국내 건설업계의 첫 해외 공사였다. 기술 낙후, 경험과 장비 부족, 쏟아지는 비, 현지인과의 갈등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 경험은 1968년 경부고속도로 공사의 밑거름이 됐다. 아산은 태국 공사에 대해 “손실 대신 얻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번 것”이라고 했다.

아산은 428km 길이의 경부고속도로를 완성하기 위해 당시 800만 달러어치의 중장비 1989대를 도입했다. 당시 국내에 있는 총 중장비 수보다 많은 숫자였다. 아산은 태국 경험을 발판으로 2년 5개월 만에 경부고속도로를 완공했다.

위기는 기회, 역발상 경영

남민우 한국청년기업가정신재단 이사장은 “무엇이든 해봐야 한다는 아산의 실천력과 기업가정신은 교과서와도 같다”고 평가했다. 이런 기업가정신을 잘 보여준 것이 전 세계를 경기 침체에 빠뜨린 오일쇼크다. 아산에게 오일쇼크는 오히려 새로운 기회였다.

1973년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원유 가격을 17% 올리자 세계 경기는 침체에 빠졌고 각국 교역 물량은 감소했다. 한국도 경기 침체에 몸부림칠 때 아산은 막대한 오일 달러를 벌어들이는 중동으로 진출했다.

아산은 1976년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9억3114만 달러에 수주했다. 단일 업체가 맡은 공사로는 세계 최대였고, 당시 한국 예산의 절반이었다. 현지 인프라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산은 공기를 단축시키기 위해 모든 기자재를 울산조선소에서 제작해 최대 태풍권인 필리핀을 지나 동남아, 인도양을 거쳐 걸프 만까지 총 1만2000km를 대형 바지선으로 운반하자는 구상을 세웠다. 주변 모든 이들이 반대했으나 아산은 성공적으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현대건설은 1975∼1979년 중동에서 51억6400만 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였다.

‘밑져야 본전’ vs ‘감당하기 힘든 리스크’

요즘 기업인들은 아산이 보여준 도전 정신이 사라진 게 본인들 탓만은 아니라고 항변한다. 아산이 사업을 하던 때와 지금의 경제사회적 환경은 크게 달라졌다는 것이다. 아산이 스스로도 말했듯이 ‘밑져야 본전’인 당시와 저성장이 고착되고 잃을 것이 너무 많아진 국내 대기업의 투자 판단을 같은 잣대로 봐서는 안 된다는 설명이다. 문제는 한국에서는 대기업뿐 아니라 신규 창업자들의 기업가 정신도 발휘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임정욱 스타트업얼라이언스센터장은 “중국은 알리바바의 마윈, 미국은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 같은 사람이 새로운 부를 창출하며 경제를 이끌지만 한국에서는 새로운 창업자가 성장시킨 회사가 거의 없어 경제의 역동성이 떨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술 기반의 국내 벤처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창업자들이 장기간 사업의 가치를 끌어올려 기업을 성장시키기보다 주식상장(IPO)이나 인수합병(M&A)으로 단기간에 경제적 대가를 얻는 데만 치중하는 탓도 크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기업가 정신이 살아나려면 기업인이 감수할 수 있는 위험의 크기를 줄이는 이른바 ‘리스크 헤징’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기업이 대규모 투자가 필요할 때 다양한 투자자들이 함께 참여해 위험을 나눌 수 있도록 자본시장의 크기를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강유현 yhkang@donga.com·정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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