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금융규제’부터 없애라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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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리스크, 새로운 금융]<4>금융선진화, 정부가 먼저 변해야 한다

#1. 1월 말 신용카드사 개인정보 유출 사태가 확산되자 금융당국은 2차 피해를 막겠다며 텔레마케팅 등 금융사의 비대면(非對面) 영업을 전면 금지하는 대책을 내놨다. 그러자 텔레마케터, 대출모집인들의 반발과 외국계 보험사의 항의가 이어졌다. AIA생명의 글로벌 본사인 AIA그룹은 당국에 항의 서한까지 보냈다. 당국은 대책 발표 2주 만에 해당 조치를 철회했다. 한 외국계 금융사의 최고경영자(CEO)는 “오락가락 대책이 혼란을 부채질했다. 한국 금융당국은 일관성 있는 ‘규제 철학’이 부족하다”고 꼬집었다.

#2. 국내에 진출한 중국계 5대 은행은 지난해 말 금융당국으로부터 위안화 예금이 단기간에 급증하고 있으니 예금 유치를 자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공문도 없는 구두 요청이었지만 부담을 느낀 중국계 은행들은 유치를 중단했고, 당시 한 달에 25억 달러(약 2조6000억 원)씩 늘던 위안화 예금은 올 1월 9억 달러, 2월 6000만 달러 증가하는 데 그쳤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정부가 은행 본연의 업무인 수신까지 간섭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비판했다.

한국 금융산업의 선진화를 위해 금융당국의 혁신을 주문하는 목소리가 높다. 급변하는 세계 금융시장 환경에 맞춰 규제를 손질하고 금융당국이 ‘투명하고 예측 가능한 규칙을 만드는 심판’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28일 열리는 ‘2014 동아국제금융포럼’에서 기조강연을 하는 로버트 실러 미국 예일대 교수는 “한국 금융 시스템은 정경 유착의 이미지가 강하다”며 “금융 규제 시스템을 어떻게 업그레이드하는지가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

○ “과도한 정부 개입이 금융 선진화 걸림돌”

최근 전국경제인연합회가 국내에 진출한 외국계 금융사를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홍콩 싱가포르 등 금융 선진국의 금융산업 경쟁력을 100점으로 볼 때 한국은 67.5점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외국계 금융사들은 그 이유로 ‘과도한 규제 및 정부의 과도한 개입’(64.2%)을 가장 많이 꼽았다. 한국이 금융 선진국으로 가기 위한 과제를 묻는 질문에도 ‘규제 완화’(71.8%)를 꼽은 응답이 가장 많았다.

현재 금융 관련 법령이나 규정 등 명문화된 규제는 867개에 이른다. 2009년 말 726개에서 약 20%가 늘었다.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 금융 관련 협회의 가이드라인, 행정지도, 모범규준 등 법령에 명시되지 않은 규제도 756개나 된다.

하지만 금융업계 관계자들은 “겉으로 드러난 규제보다 보이지 않는 정부의 통제와 개입이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대표적인 것이 정부의 가격 통제다. 손해보험사들은 물가 인상을 우려하는 금융당국의 압박에 2011년 이후 자동차 보험료를 동결해왔고 자동차보험에서만 지난해 1조3961억 원의 적자를 봤다. 은행도 금융소비자 보호를 앞세운 당국의 압박에 각종 수수료를 줄이거나 폐지한 결과 수수료 수익이 포함된 비이자이익이 지난해 3000억 원 줄었다.

정책 기조 변화에 따른 규제 리스크도 적지 않다. 고졸 정규직이나 시간제 일자리 채용, 부실 대기업 지원 등을 밀어붙이는 정부 눈치를 보며 ‘울며 겨자 먹기’로 동참하는 은행도 있다. 모피아(재무부+마피아)나 금피아(금감원+마피아)로 불리는 금융권 낙하산 인사들이 만들어내는 관치금융 관행도 여전하다.

○ “정부 큰 틀만 제시, 나머지는 시장에 맡겨야”

박근혜 대통령이 금융을 5대 유망 서비스산업으로 선정하고 금융 규제 개혁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면서 정부도 금융권에 숨어 있는 규제를 모두 찾아내 개혁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다.

전문가들은 금융사들이 글로벌 금융환경에 맞게 변화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똑똑한’ 금융 규제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윤창현 한국금융연구원장은 “시장 경쟁력과 금융산업 발전을 저해하는 진입 규제, 영업 규제는 과감하게 완화하되 금융사 건전성 강화, 소비자 보호, 개인정보 보호와 관련된 규제는 강화하는 ‘투 트랙’ 전략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금융 규제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높이려면 금융당국의 변화도 필요하다. 장기적이고 일관성이 있으며 예측 가능한 정책 및 감독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김소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금융당국이 시시콜콜 간섭하고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정부는 공정한 시장 환경이라는 큰 틀만 만들어주고 나머지는 금융사에 자유롭게 맡겨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임수 기자 imsoo@donga.com
#그림자 금융규제#금융선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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