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 도는 업종은 예외없이 세무조사… 불경기에 쥐어짜나”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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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견-중소기업들 한숨

“고객 기업에서 걸려오는 세무조사 관련 문의전화가 부쩍 늘었어요. 얼마 전에는 우리 사무실까지 세무조사를 받았으니 말 다한 거 아닙니까. 작년까지 고객 기업 중 10개가 세무조사를 받았다면 올해는 17∼20개 정도 돼요. 조사만 받으면 연 매출액의 1∼2% 정도는 기본으로 추징당하니 기업들로서는 속 터질 노릇이죠.”(서울의 A 세무·회계사무소 대표)

올 4월 국세청은 ‘지하경제 양성화 추진방안’을 발표하면서 대기업과 고액재산가, 역외탈세 등 서민경제에 영향이 없는 분야에 조사를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두 달여 지난 지금 기업들이 체감하는 현실은 이런 방침과 큰 차이가 있다.

취재진이 만난 기업인, 자영업자들은 “중소기업, 개인사업자에 대한 세무조사의 강도나 범위가 이전보다 훨씬 확대됐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세정당국은 “이미 발표한 방침에 따라 세금을 제대로 부과하는 것뿐인데 오해가 많은 것 같다”는 반응이다.

○ 기업인들 “당국 눈에 띄면 바로 세무조사”

“요즘 회원사들이 모이기만 하면 온통 세무조사 얘기뿐이에요.”

충청권에서 한 중소기업단체의 회장을 맡고 있는 B 씨에 따르면 최근 세무조사의 주된 타깃은 연매출 500억 원 안팎의 중견 기업들이다. 과거에는 조사가 개별 기업에 한정됐지만 요즘은 특정 지역에 있는 비슷한 업종의 회사 10여 곳이 한꺼번에 조사를 받는 일이 적지 않다는 설명이다. B 씨는 “얼마 전에는 식품회사 한 곳이 신문에 제품 광고를 크게 냈더니 바로 세무조사가 들어왔다”면서 “언론 광고나 마케팅을 눈에 띄게 많이 하면 바로 당국이 주목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온다”고 전했다.

업계에서는 대기업이나 고액 자산가들은 탈세수법이 지능적이고 복잡해 조사에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고, 세금 추징도 어렵다 보니 세정당국이 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수룩한’ 중견·중소기업을 압박하는 일이 많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기계장치 부문의 한 업종단체 회장 C 씨는 “요즘 세무 대리인들이 전화를 걸어와 ‘세무조사 강도가 세졌으니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한다”면서 “국세청장이 ‘연매출 100억 원 이하 중소기업은 원칙적으로 세무조사를 안 할 것’이라고 했지만 실제 상황은 많이 다르다”고 털어놨다.

기업의 규모나 개인·법인 여부를 가리지 않고 특정 업종이나 분야를 타깃으로 조사하는 ‘기획 세무조사’도 많아졌다. 2005년에 세무조사를 받은 이후 8년 만에 세무조사를 받는다는 휴대전화 대리점 사장 D 씨는 “최근 휴대전화 시장이 과열됐다는 보도 때문인지 애꿎은 대리점들을 정부가 몰아세우고 있다”면서 “매출 규모는 커도 통신사에 이것저것 떼이고 나면 마진은 형편없는데도 세금을 더 내라고 해 장사를 접어야 할 판”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처럼 최근 국세청의 세무조사는 유통, 식품 등 순이익에 비해 매출 규모가 큰 업종에서 집중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귀금속 유통의 중심지인 서울 종로의 귀금속상가 도매업체들도 요즘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선 세무사들은 “현장에 나온 조사 직원들의 태도가 과거와 180도 달라졌다”고 입을 모은다. 서울의 한 세무사는 “전에는 국세청 직원에게 고객 기업이나 관련 업계의 사정을 얘기하면 어느 정도 융통성이 있었는데 요즘은 무조건 원칙대로 한다”면서 “그러다 보니 몇 년 전의 일까지 문제가 돼 한꺼번에 세금을 내는 기업, 자영업자가 많아졌다”고 말했다.

○ “무리한 세수 목표 수정해야”

국세청은 기업들의 불만을 수긍하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중소기업, 영세상인에 대한 세무조사 건수가 실제로는 줄어든 만큼 기업, 자영업자들의 반응이 다소 과장됐다는 시각이다.

국세청 관계자는 “일선 세무서의 조사직원을 지방청으로 옮긴 것도 대기업 등 혐의가 큰 조사에 힘을 쏟기 위한 것”이라면서 “다만 최근 ‘지하경제 양성화’ 차원에서 과거보다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하다 보니 이런 말이 도는 것 같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국세청이 경기침체에 따른 세수 부족분을 메워야 한다는 압박을 강하게 받는 상황에서 현장에서 발생하는 부작용은 피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수도권에 근무하는 한 일선 세무서의 과장은 “세무서별로 실적 압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면서 “세무조사는 물론이고 납세자에게 다시 제대로 신고하라고 요구하는 ‘수정신고’라도 해서 실적을 높여야 하는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거시경제 당국이 지하경제 양성화를 통해 확보하려는 복지재원의 목표액을 현실화하지 않는다면 세무조사와 관련한 현장의 불만이 실질적으로 해소되기 어렵다는 의미다. 홍기용 인천대 경영학부 교수는 “경기 침체기에 세무조사로 확보할 수 있는 세수는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부작용도 적지 않다”면서 “지금이라도 정부는 지하경제 양성화로 복지 재원을 마련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거시정책 전반을 다시 손봐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유재동 기자·강유현 기자 jarrett@donga.com
#중견#세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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