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低의 틈새… 원화 대출로 갈아타기 붐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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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저리 재다가 재앙 또 겪을라”
5년전 학습효과에 기업들 몸사리기… 4월 엔화대출 작년대비 13% 줄어

인천 남동구 논현동 남동공단에 있는 반도체부품 제조업체 A사는 이달 들어 엔화 대출 3000만 엔(약 3억2400만 원)을 모두 원화 대출로 바꿨다. 원-엔 환율이 100엔당 800원대 중반이었던 2006년에 A사는 은행의 권유로 5000만 엔을 대출받았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환율이 100엔당 1500원을 돌파하자 원금과 이자 부담이 크게 늘어 고통을 겪었다. 요즘처럼 원-엔 환율이 계속 떨어지면 부담은 줄지만, 이 회사는 “괜히 이리저리 쟀다가 그때의 악몽을 또 겪을 수 있다”며 대출 전환을 결정했다.

엔화 약세가 지속되면서 원-엔 환율이 2008년 9월 이후 4년 8개월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시중은행의 엔화 대출은 갈수록 감소하고 있다. 보통 환율이 하락하면 그만큼 외화 대출에 따르는 부담이 줄어 대출이 늘지만 기업들이 과거 엔화 대출에 크게 데인 상처를 떠올리며 각별히 ‘몸조심’을 하고 있어서다.

○ 환율 떨어지지만 엔화 대출은 감소

22일 동아일보가 6대 시중 은행(국민 우리 신한 하나 기업 외환) 엔화 대출 잔액을 집계한 결과 4월 말 기준 엔화 대출액은 7053억 엔(약 7조6172억 원)이었다. 지난해 4월 말(8131억 엔)보다 13.3%, 지난해 말과 비교해 7.3% 줄어든 것이다.

지난해 6월 4일 100엔당 1514.8원을 정점으로 원-엔 환율이 1년 가까이 떨어졌지만 엔화 대출 잔액은 지난 1년간 월간 기준으로 한 번도 늘어나지 않았다.

원-엔 환율이 100엔당 800∼900원 정도였던 2006년 전후와 정반대의 모습이다. 당시 은행들은 일본에서 기계 및 원자재를 들여오는 중소기업은 물론이고 값비싼 의료 장비를 사들이던 서울 강남의 성형외과에까지 무분별하게 엔화 대출을 권유했다. 금리가 싼 엔화를 빌려 다른 나라의 고금리 자산에 투자하는 ‘엔캐리 트레이드’가 성행하던 시기였고 환율 변동에 따른 ‘환 위험’에 대한 대출자들의 인식 수준은 매우 낮았다.

지난 5년여간 엔화 대출로 고통을 겪던 주요 기업들은 최근의 엔화 약세를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 100엔당 1600원을 돌파하던 2009년 2월과 비교하면 같은 규모의 엔화 대출을 두고도 갚아야 할 부담이 3분의 1가량 줄었기 때문이다. 은행도 기업의 움직임에 대처하기 위해 엔화 대출을 원화 대출로 전환해주는 상품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2005∼2007년에 엔화 대출을 받았다가 고생한 고객 중 많은 분들이 환율이 다시 오르기 전에 대출을 전환하겠다고 찾아온다”며 “일선 창구에서도 환 위험을 감당하기 어려워 보이는 기업에는 엔화 대출보다 원화 대출을 권한다”고 말했다.

○ 금융 당국 “엔화 대출 수시 점검할 것”


금융 당국도 엔화 대출 단속에 나서고 있다. 정찬우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16일 금융상황점검회의에서 “엔화 대출 동향을 수시로 점검하겠다”고 밝히자 금융감독원은 22일 주요 은행 자금부서장을 모아놓고 엔화 대출에 대한 까다로운 관리를 주문했다.

금감원은 제2의 ‘엔화 대출 대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대출할 때 환율 변동 가능성을 상세히 설명하라고 지시했다. 또 환차익을 노리는 대출자나 평소 외환 거래가 없는 기업에는 아예 대출을 해 주지 말도록 방침을 정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여러 대외 악재로 외환시장과 금융시장이 요동칠 소지가 있는 만큼 외화 대출 증가로 인한 외화 유동성 문제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조치”라고 말했다.

이상훈 기자 january@donga.com
#원화#엔화대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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