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史哲’ 약하면 한국은행 입사 어렵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2월 14일 07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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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관·결혼관에서 세대 간의 가치가 차이가 나는 이유를 논하라" 무슨 시험문제일까?

인문계 고등학교나 인문과학을 기반으로 한 기관의 논술시험 같지만 사실은 아니다.

대한민국 최고 경제 엘리트가 모여 있다는 한국은행의 2012년 신입행원 필기시험 논문형 문제다.

한은은 최근 1차 서류전형, 2차 필기시험, 3차 면접ㆍ신체검사를 거쳐 52명의 합격자를 확정했다.

수험생들이 치열하게 경합한 필기시험은 400점짜리 학술, 논술이다.

학술(200점)은 경제학, 경영학, 회계학, 법학, 통계학 등 5개 전공을 대상으로 선다형, 분석형, 서술형 방식으로 치러졌다.

눈에 띄는 것은 논술이다. 점수는 학술과 같이 200점이다. 전공논술과 별도로 낸 일반논술 논제는 가족관, 결혼관과 세대 간 차이를 묻는 것이었다. 한은이 명시적으로 요구한 5대 전공의 학습내용과 거의 연관성이 없다.

분량 제한 없이 B4 크기 답안지만 줬다. 배점도 100점으로 전체 필기시험의 25%를 점해 당락에 크게 영향을 미칠 정도였다.

이를 두고 한은 안팎에서는 "상당수 수험생이 적잖게 당황했을 것"이라는 평이 나왔다.

전공논술 논제는 "외국자본 유입에 의한 환율 변화를 논하라"였다. 경제학 전공자라면 막힘없이 적을 수 있을 정도로 평이했다.

한은에서 인문과학적 사고를 요구하는 문제가 필기시험 과목으로 등장한 데는 유난히 문사철(文史哲)을 강조하는 김중수 총재의 뜻이 반영됐다.

김 총재는 최근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박원순 현상에 관심을 둬야 한다.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을 둘러싼 논란을 남의 일처럼 생각해선 안된다"라거나 "월가 시위에 대한 국내외 시각과 평가는 무엇인가"고 자주 묻는다고 한다.

이는 "한은의 목표와 기능이 물가, 금융안정이라고 해서 세상 돌아가는 일에 '나 몰라라'해서는 안 된다"는 김 총재의 소신 때문이다.

김 총재는 신입행원을 선발하는 과정에서도 경제뿐 아니라 문사철 문제를 내서 인재를 고르게 등용할 것을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입행원 중에는 경제 관련 학문을 복수전공했으나 원래 전공이 영문, 국문학인합격자도 상당수 있다.

한은은 고졸자와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를 별도 전형하는 방안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1년부터 신입행원 선발에 학력제한을 두지 않았는데도 지금까지 단 한 명의 고졸자도 한은 문턱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은 관계자는 14일 "총재의 뜻에 따라 필기고시에 인문학적 색채를 대폭 반영했다"면서 "아직 본격적인 검토 단계는 아니지만 고졸자·장애인을 우대해 선발하는방안을 신중히 모색하고 있다"고 전했다.

디지털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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