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신화 일군 박태준, 그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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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13일 18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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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동아일보DB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동아일보DB
13일 타계한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군인이자 정치인이기도 했지만 '포철신화'를 통해 철강산업을 일으킨 '철의 사나이'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정계에서도 4선 의원에 총리까지 화려한 경력을 쌓았지만 경제인으로서 남긴 발자취가 더 뚜렷하기 때문이다.

1927년 9월 29일 경남 동래군 장안면에서 태어난 고인은 일본에서 성장해 1945년 와세다 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으나, 해방으로 학업을 중단한 후 귀국해 1948년 육군사관학교를 6기로 졸업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처음 만나 인연을 쌓은 것도 이때였다.

1961년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에 발탁되면서 정계에 잠시 발을 들여놓았던 고인은 1963년 육군소장으로 예편한 후 이듬해 텅스텐 수출업체인 대한중석 사장으로 임명되면서 경제인으로 변신했다.

고인은 만성 적자기업이었던 대한중석을 1년 만에 흑자기업으로 바꾸었고, 1968년 탁월한 경영능력을 높게 평가한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종합제철소 건설의 임무를 부여받게 된다.

하지만 자본은 물론 경험이나 기술이 없는 상황에서 제철소 건설작업이 순탄치는 않았다.

당시 일관제철소 건설 지원을 위해 조직된 국제차관단이 차관 공여를 철회하면서 건설 계획이 무산 위기에 놓이기도 했지만, 고인은 대일 청구권 자금을 제철소 건설자금으로 전용하자는 발상을 내고 이를 성사시켜 1970년 착공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고인은 "이 제철소는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금으로 받은 조상의 혈세로 짓는 것이다. 만일 실패하면 바로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한다는 각오로 일해야 한다"고 말하며 '제철보국(製鐵報國)'의 정신을 강조했다.

조업개시 6개월 만에 흑자를 달성한 고인은 1기의 성공을 바탕으로 광양에 제2제철소를 건설하고 1992년 2100만t 생산체제를 구축, 세계 철강업계로부터 신화창조자(Miracle-Maker)라는 칭송을 받았다.

포스코 역사 40년 중 26년을 최고경영자로 재직했던 고인은 1987년 현역 철강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철강의 노벨상인 베세머 금상을, 1992년에는 세계적 철강상인 윌리코프상을 수상했다.

고인이 정계에 본격적으로 입문한 계기는 1980년 신군부가 주도한 국보위 입법회의에 경제분과위원장으로 참여하면서부터다.

그 뒤 포항제철 회장을 겸임하면서 11, 13, 14대 등 3선 경력을 쌓았고 1990년 1월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의해 민정당 대표로 박탈되면서 정치의 전면에 서게 됐다.

그러나 민정당 대표 취임 후 '3당 합당'이 이뤄지고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악연이 시작되면서 정치인 박태준은 곧 시련을 맞게 된다.

1992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 씨와 맞서다 좌절한 고인은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그해 3월 포철의 명예회장직을 박탈당한 것은 물론 수뢰 및 뇌물수수혐의로 기소됐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1997년 포항 보선 출마를 위해 귀국할 때까지 4년여의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포항북구 보선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계에 복귀한 고인은 그해 9월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와의 '도쿄(東京)회동'을 계기로 이른바 'DJP연합'에 합류한 뒤 야당후보 단일화 협상이 타결되자 같은 해 11월 21일 자민련 총재직에 취임했다.

이런 영욕을 거듭한 끝에 2000년에는 총리직을 맡았지만, 그해 5월 부동산투기 및 명의신탁 문제가 불거지면서 4개월의 단명 총리로 불명예 퇴진했다.

2001년에는 뉴욕 코넬대학병원에서 폐 밑 물혹 제거수술을 받았고 포철 명예회장으로 다시 위촉됐다.

디지털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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