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참여한 환태평양FTA, 韓-칠레FTA에 큰 위협”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1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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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레 진출 기업인들 우려“한국산 세탁기 관세 6%인데 日제품은 아예 무관세 될 듯”

10일 칠레 수도 산티아고 시내 케네디 거리에 있는 파리스 백화점 파르케 아라우코 지점.

이곳 가전제품 매장 안에 있는 기둥 3곳에는 칠레기업 마뎀과 함께 LG전자와 삼성전자의 로고가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라파엘 라고스 지점장은 “구매력 있는 칠레 중산층에게 한국 가전제품의 품질이 좋다는 것은 상식”이라며 “칠레인들은 LG와 삼성 제품이 한국이 아닌 중국 등에서 생산된다는 사실을 알고도 선뜻 산다”고 말했다. 연간 1억 달러가량의 매출을 올리는 파르케 아라우코 지점에서 LG, 삼성의 매출비중은 각각 20.9%와 16.0%로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을 제치고 1, 2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이 참여하기로 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타결되면 이 같은 한국기업의 우위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2004년 4월 체결된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으로 한국 가전제품의 수입 관세가 인하됐지만 TPP 협상이 타결되면 일본 가전제품은 아예 무관세 혜택을 받게 된다. 반면 TPP에 참여하지 않는 한국의 세탁기와 냉장고는 한-칠레 FTA에 따라 관세감축 제외품목으로 묶여 6.0%의 높은 수입관세를 문다. 라고스 지점장은 “칠레 사람들은 여전히 일본의 소니를 최고의 전자제품 브랜드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관세가 얼마나 붙느냐에 따라 현재의 구도가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같은 상황은 가전제품뿐 아니라 다른 수출품목도 마찬가지다. 칠레에서 한국 차는 ‘없어서 못 파는 제품’이다. 현대자동차의 ‘i30’ ‘투싼’ 등 인기 차종은 주문 후 출고까지 1∼2개월이 걸리는 게 예사다. 하지만 TPP가 타결되면 자동차, 타이어 등 단계적 관세인하 적용대상 품목도 TPP의 관세철폐 일정에 따라 타격을 받을 수 있다. 일본은 지난해 칠레 자동차 시장의 20.8%를 차지하며 우리나라 자동차 메이커를 맹렬히 추격하고 있다.

KOTRA 산티아고 무역관에 따르면 우리나라 기업은 지난해 기준으로 칠레의 150대 수입 품목 가운데 자동차, 세탁기, 폴리에스테르 섬유 등 40개 품목에서 시장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다. 시장점유율 5위권에는 무려 129개 품목이 들어 있다. 사실상 칠레가 수입하는 대부분의 품목을 우리나라 기업이 수출하고 있는 셈이다. 일본보다 먼저 칠레와 FTA를 맺은 결과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 칠레 등이 농산물을 포함한 모든 제품의 관세를 일시에 철폐하는 TPP를 체결하고 한미 FTA가 장기 표류한다면 한국의 수출 여건은 칠레는 물론이고 미국, 일본에서 동시에 악화될 수밖에 없다. 수출로 먹고사는 대한민국의 생존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산티아고에서 만난 한 국내 기업 주재원은 “일본은 농산물 시장의 희생까지 감수하며 TPP 가입을 추진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국회는 한미 FTA 비준안조차 처리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 가슴이 먹먹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 TPP를 사실상의 ‘미일 FTA’로 인식하는 것은 너무 안일한 생각”이라며 “TPP는 관세철폐를 기본 전제로 하는 ‘경제블록’의 성격이어서 상품교역 외에도 서비스, 투자 등 다른 분야에도 직간접의 타격이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칠레에 진출한 국내 기업인들은 “FTA 문제를 국익 차원에서 생각하지 않고 정쟁(政爭)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문제”라며 “통상정책에 관한 한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칠레를 보고 배워야 한다”고 쓴소리를 했다.

칠레는 1974년 피노체트가 집권한 뒤 관세를 낮추고 구리, 농산물 등 경쟁력 있는 자국 제품의 수출을 장려하는 개방정책을 썼다. 1990년 중도좌파 연합이 집권하며 정권을 민간에 이양해 지난해 기업인 출신의 우파 정치인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이 당선된 뒤에도 이 같은 자유무역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산티아고=전성철 기자 daw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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