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지조각 된 여야 원내대표 ‘FTA 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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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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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의총 ‘ISD 절충안’ 거부… 외통위원장실 봉쇄“MB, G20 가서 오바마에 재협상 약속 받아오라”

“처리”vs“반대” 31일 저녁 국회 외교통일통상위원회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처리가 무산된 뒤 한나라당 소속 남경필 외통위원장이 회의장 밖에서 “물리적 충돌을 해가며 회의를 더 진행하지는 않겠다”고 밝히고 
있다(왼쪽 사진). 민주당 정동영 의원이 “지금은 애국이냐, 매국이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며 한미 FTA 비준동의안 처리 반대를 
주장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처리”vs“반대” 31일 저녁 국회 외교통일통상위원회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처리가 무산된 뒤 한나라당 소속 남경필 외통위원장이 회의장 밖에서 “물리적 충돌을 해가며 회의를 더 진행하지는 않겠다”고 밝히고 있다(왼쪽 사진). 민주당 정동영 의원이 “지금은 애국이냐, 매국이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며 한미 FTA 비준동의안 처리 반대를 주장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31일 오후 7시 24분경 국회 본청 4층 외교통상통일위원회 회의장 주변은 아수라장이었다. 외통위원장실 입구 앞에 20여 대의 카메라와 200여 명에 이르는 여야 보좌진들과 취재진, 한나라당 외통위원 10여 명과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의원 30여 명이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메웠다.

남경필 외통위원장이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는 “물리적 충돌을 야기하면서까지 더 회의를 진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상기된 표정의 남 위원장은 “민주당과 민노당 의원 일부가 회의장 주변을 에워싸고 점거한 상태가 계속됐고, 국민에게 더는 실망을 드리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회의를 진행하지 않겠다”면서 “그러나 이것은 민주주의의 모습이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남 위원장은 “민주당이 비겁하다”며 “노무현 정부 당시 투자자 국가소송제도(ISD)가 잘됐다고 했던 분들이 지금 와서…”라고 비판을 이어갔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야당 보좌진들이 “쇼 하지 마라” “당신이 비겁하다” “어디서 고인을 팔아먹느냐”는 등의 고함을 지르면서 한때 소동이 벌어졌다. 이들은 그래도 남 위원장이 계속 발언하자 “우∼우” 하면서 발언을 방해했다. 남 위원장은 어렵게 발언을 마친 뒤 자리에서 나왔고 외통위 전체회의는 개의도 못하고 무산됐다. 민노당 보좌진들은 전날 한나라당과 협상한 민주당에 대해서도 “비겁한 민주당”이라고 외치기도 했다.

이날 외통위에서 벌어진 난장판은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의원들이 여야 원내대표가 합의한 ISD 해법을 거부하면서 예고됐다.

자유무역협정(FTA) 조항인 ISD는 경제주권 침해 여부를 놓고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해온 사안이다.

여야 원내대표는 지난달 30일 심야회동에서 ‘한미 양국이 협정 발효 뒤 3개월 안에 ISD를 유지할지 협의를 시작해 1년 안에 국회에 결과를 보고하고 국회가 3개월 안에 수용 여부를 결정한다’는 절충안이 담긴 여야정(한나라당 민주당 정부) 합의문에 서명했다.

그러나 31일 오전 9시 반경 시작된 의총에서는 “ISD에 대한 한미 간 협의는 협정 발효 뒤가 아니라 비준 전에 해야 한다”는 주장이 이어졌다. 민노당은 “여야 원내대표의 합의는 FTA 비준동의안 처리를 반대해온 야권 정책 공조 파기”라고 비난했다.

결국 민주당은 오후 4시 50분경 ISD 절충안을 거부하기로 하고 한나라당에 “미국으로부터 ISD 폐지를 위한 재협상 약속을 받아야 비준동의안 처리를 위한 표결에 협조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민주당 김진표 원내대표는 “3, 4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만나 이런 약속을 받아오라”고 요구했다. 하루 만에 여야 원내대표의 합의가 휴지조각이 된 것이다.

남 위원장은 민주당의 제안과 관련해 여야 4인 회동을 가진 뒤 기자들과 만나 “협정문에 사인한 지 얼마 안 되는데 그걸 대통령이 빼오라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박했다. 한나라당은 “비준동의안 처리 전에 한미 양국이 ISD 폐지를 협의하면 FTA 발효가 지체된다”며 민주당 요구를 거부했다.

이어 한나라당 소속 남 위원장이 외통위 전체회의를 소집했고 외통위 소속 한나라당 의원들은 오후 6시경 외통위 회의실로 향했다. 이를 알아챈 민주당, 민노당 의원 40여 명이 외통위 회의장을 점거하면서 사달이 벌어졌다. 남 위원장은 질서유지권까지 발동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남 위원장의 발언에 이어 민주당 정동영 최고위원이 같은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정 최고위원은 “참여정부에서 FTA를 체결한 것을 인정한다. 잘못된 판단이었다”며 “법무부 재경부 대법원장은 모두 반대했지만 외교통상부 통상관료들이 대통령과 여당을 속이고 나라를 사실상 팔아넘겼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이어 “다섯 번째 날치기는 한나라당의 무덤이 될 것”이라며 “한미 FTA는 애국이냐 매국이냐 갈림길에 서 있는 중차대한 문제로 당이 아닌 국민의 운명을 위해 싸우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 최고위원은 “이명박 대통령이 ISD 재협상 약속을 받아오면 몸싸움을 안 하고 당당히 표결처리에 응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여의도 (국회의사당) 둘레가 2400m로 1m마다 2사람씩 4800명이면 국회를 둘러쌀 수 있다”며 “(국민들은) 11월 3일 국회로 와달라”고 호소했다.

이어 등장한 민노당 강기갑 의원도 “이명박 정부가 참여정부 얘기하면서 야당을 헐뜯는 것은 적반하장”이라며 “한국이 강아지처럼 미국 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녀야 하느냐. 이명박 정권이 미국의 쫄쫄이 행세를 하고 있다”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이어 강 의원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한나라당이 강행 처리할 가능성에 대비하겠다며 외통위원장실에서 철야 농성을 시작했다. 민주당 이종걸 전혜숙 김진애 의원도 철야 농성에 동참했다.

이날 여야 원내대표가 서명한 여야정 합의문에는 민주당이 경제주권을 침해하는 독소조항이라며 재협상을 요구한 사안들에 대해 재협상을 전제하지 않는 선에서 일부 요구를 받아들인 내용들이 담겼다.

여당은 정부에 개성공단 제품의 한국산 인정을 위해 구체적 계획을 마련하고 친환경 무상급식 정책의 안정성 확보를 위해 학교 급식용 식자재를 FTA 협정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해 달라고 요구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농어업 대책에서도 △피해보전 직불금 지원 요건 완화 △밭농업과 수산업 종사자에 대한 직불금 신설 △농사용 전기료 감면 혜택 확대 등 민주당이 핵심적으로 요구한 3개항을 전격 수용했다.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지원대책에서는 △중소기업 적합업종 특별법(중소기업청이 고시한 업종에서 대기업의 진출을 금지하는 것) 제정 △FTA로 피해를 보는 기업과 근로자를 지원하는 무역조정지원제도의 대상 확대 등 민주당 요구 대부분을 받아들였다.

▶본보 10월 31일자 A1면 여야정, 한미FTA 피해보전 대책 합의
▶본보 10월 31일자 A5면 민주당 한미 FTA 자체 여론조사…

고성호 기자 sungho@donga.com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 정동영 2006년엔 “FTA는 한미관계 지탱할 기둥” ▼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문제 앞에만 서면 민주당은 작아진다.”

요즘 민주당 내에선 이 같은 얘기가 많이 나돈다. “이명박 정부 들어 재재협상이 이뤄져 상황이 바뀌었다”며 한미 FTA 비준동의안 처리 반대를 외치고는 있지만 한미 FTA가 노무현 정부 때인 2007년 체결됐다는 점에서 어떤 반대 논리를 펴도 군색하다는 것이다. 한 핵심 당직자는 “일종의 원죄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더욱이 “비준안 처리 저지를 위해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겠다”며 투쟁 방침을 밝힌 민주당 지도부는 대다수가 노무현 정부 때 요직에 있었다. 김진표 원내대표는 2003년 경제부총리로서 FTA 추진 로드맵을 확정했다. 노무현 정부 때 여당이자 민주당의 전신인 열린우리당은 2007년 7월 ‘한미 FTA 협상 결과 평가보고서’에서 “한미 FTA는 ‘제2의 개항’이라고 불릴 정도로 대대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했는데, 이 보고서를 주도한 열린우리당의 한미 FTA 평가위원장이 김 원내대표였다.

정동영 천정배 정세균 최고위원은 노무현 정부 시절 각각 통일부 장관, 법무부 장관,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냈다. 특히 한미 FTA를 ‘신(新)을사늑약’이라고 맹비난한 정동영 최고위원은 과거엔 “한미 FTA가 완성되면 향후 50년간 한미관계를 지탱해줄 기둥이 (한미 군사동맹에 이어) 두 번째로 생겨나는 것”(2006년 열린우리당 의장 시절)이라고까지 했다. 한미 FTA 비준동의안 처리 등에 대한 원내 대책을 브리핑하고 있는 홍영표 원내대변인은 한미 FTA 체결지원위원회 지원단장(2006년), 재정경제부 FTA 국내대책본부장(2007년) 출신이다.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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