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았다…뭐하나…바꾸자” 성난 민심에 정권 와르르

  • 입력 2009년 9월 3일 02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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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이 진 빚을 왜 우리 아이들이 갚나”지난달 21일 아이슬란드 국회의사당 앞. 시위대가 만든 빨랫줄에 아기 인형들과 항의 문구가 걸려 있다. 인형에 붙어 있는 문구 ‘B¨orn borga’는 아이슬란드어로 “우리 아이들이 갚아야 한다”는 뜻이다. 은행들이 잘못해 파산했는데 왜 국민들이 대대손손 은행의 빚을 갚아야 하느냐는 항의의 표시다. 레이캬비크=정재윤 기자
“은행이 진 빚을 왜 우리 아이들이 갚나”
지난달 21일 아이슬란드 국회의사당 앞. 시위대가 만든 빨랫줄에 아기 인형들과 항의 문구가 걸려 있다. 인형에 붙어 있는 문구 ‘B¨orn borga’는 아이슬란드어로 “우리 아이들이 갚아야 한다”는 뜻이다. 은행들이 잘못해 파산했는데 왜 국민들이 대대손손 은행의 빚을 갚아야 하느냐는 항의의 표시다. 레이캬비크=정재윤 기자
[경제위기 1년/세계 중산층 리포트]<3>분노가 가져온 정치 후폭풍

엔화대출 ‘쪽박’ 아이슬란드人
은행-정권 부도덕한 거래… 처벌 안되면 내가 이민간다

취업길 막힌 영국 대학원생
현 총리가 위기 초래한 주범… 野도 믿음 안 가긴 마찬가지

印-브라질 등 ‘선방’ 국가는 굳건
정부대응 만족… 계속 지지, 서방은 절약하는 법 배워라

《“헝가리에서 살려면 심장이 강해야 한다. 정부가 워낙 거짓말을 많이 해 쇼크 받을 일이 많기 때문이다.”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만난 실직자 쿠헐미 페테르 씨(41·전직 은행원)는 경제위기로 인한 생활의 변화를 묻는 질문에 정부 비난부터 시작했다.

지난달 12일 부다페스트 바르토크벨러 거리의 실업급여센터 앞에는 10여 명이 서성이고 있었다. 사무실 안은 이미 30명 이상 들어차 있어 앉을 자리도 없었다. 센터 앞에서 담배를 피우던 케르처 피렌츠니 씨(54·여)는 “아침 8시에 왔는데 오후 2시는 돼야 상담을 받을 것 같다”고 짜증을 냈다. 올해 4월 옷가게에서 해고된 그는 “여기저기서 온통 사람을 자르고만 있어 일자리를 찾을 수 없다. 이 지경이 되도록 정부는 뭘 한 건지 모르겠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요즘 부다페스트 시내는 정부의 경기부양책 때문에 곳곳에서 도로 공사가 한창이다. 하지만 이런 정책도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대학생 너지 티타닐라 씨(25·여)는 “제대로 된 업체가 선정되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정치인들은 자신과 관련된 업체에 일감을 주고 호주머니를 채우기에 급급하다. 헝가리 정치는 완전히 썩었다”고 말했다.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경제위기를 겪는 동안 미국과 일본의 정권이 교체됐고 영국, 독일, 스페인에서도 정권 교체의 기운이 높아지고 있다. 좌와 우를 가리지 않고 일어나는 정권 교체 도미노 현상은 역사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취재팀은 현지 중산층과 심층 인터뷰를 해 일련의 정치 후폭풍 뒤에는 중산층의 분노와 광범위한 민심 이반이 자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경제위기로 삶의 질이 현저하게 추락한 나라의 국민은 기존의 정치권력에 강한 분노와 불신을 드러냈다.

○ 아이슬란드 국회 광장 ‘인형 시위’

지난달 21일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 국회의사당 앞 광장. 시위대가 걸어놓은 빨랫줄에 아기인형들이 줄줄이 매달려 있다. 은행이 외국에 진 부채를 왜 우리 아이들까지 대대손손 갚아야 하느냐는 무언의 항의다.

정보기술(IT) 컨설턴트인 올라푸르 가르다르손 씨(46)는 “은행과 정권의 부도덕한 거래가 제대로 규명되고 처벌되지 않는다면 이민을 가겠다”고 말했다. 그는 2007년 5월 은행의 권유로 엔화로 모기지 대출을 받았다가 2008년 이후 크로나화가 폭락하면서 원금만 두 배 이상으로 늘어 파산 위험에 몰려 있다.

정치권에 대한 혐오는 취업길이 막힌 선진국 젊은이들에게서 두드러진다. 지난달 23일 영국 런던에서 만난 클레어 셰리던 씨(28·여)는 “얼마 전 맥도널드에서 아르바이트생을 모집하는데 경쟁률이 수십 대 1이었다”며 “도대체 이 나라에 무슨 미래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영문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셰리던 씨와 남편, 18개월 된 딸은 매달 장학금 1000파운드(약 200만 원)와 주당 20파운드씩 나오는 자녀양육금으로 생계를 잇는다. 컴퓨터그래픽 일을 하던 남편은 요즘 일자리가 없어 아기 보육과 집안 살림을 도맡게 됐다. 집세(700파운드)를 내고 나면 최저 수준의 생활조차 하기 힘들다. 셰리던 씨는 “고든 브라운 총리는 재무장관 시절 금융시스템 규제를 풀어 은행 부실을 초래한 주범”이라며 “그렇다고 이번 경제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이 된 신자유주의를 영국에 자리잡게 한 보수당이 대안이 될지는 더욱 의문”이라고 말했다.

○ 좌우를 가리지 않는 정권교체 도미노

경제위기 이후 세계 각국에서는 이념적 성향과 관계없이 집권세력이 몰락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유럽의 경우 올해 1월 아이슬란드의 우파 독립당 정권이 시민 폭동으로 무너진 뒤 라트비아, 헝가리, 체코에서 줄줄이 정권이 바뀌거나 총리가 교체됐다.

곧 쫓겨날 처지가 된 위기의 정권도 많다. 영국 집권 노동당의 지지율은 보수당보다 17%포인트나 낮아 내년 5월 총선에서 정권교체가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스페인 집권 사회당도 올해 1분기 실업률이 유럽연합(EU) 최고치인 17%로 치솟을 정도로 고용사정이 나빠 정권 유지가 쉽지 않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독일 집권 기민당(CDU)은 최근 3개주 주의회 선거에서 패한 뒤 이달 27일로 예정된 총선을 앞두고 비상이 걸렸다. ‘뼛속까지 기민당 지지파’라고 자신을 소개한 미하엘 베버 씨(53·IBM 근무)는 지지 정당을 바꿀지 고민한다. 그는 “24세 된 딸이 대학도 좋은 데 나왔고 성적도 좋았는데 1년 사이 직장을 세 번이나 바꿨다”며 “다음 세대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보수세력에 계속 정치를 맡겨도 되나 하는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새 집권세력도 분노한 중산층을 어떻게 달랠지 막막하다. 길피 마그누손 아이슬란드 상무장관은 “기존 집권당의 패배는 경제위기로 인한 정치적 징벌에 가깝다”며 “국민이 분노를 표출할 대상을 계속해서 찾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 경제 성적표와 정부 신뢰도는 정비례

경제위기 속에서 나름대로 선방하고 있는 신흥국 정부의 신뢰도는 오히려 높아지고 있다.

갤럽 등 전 세계 시장조사기관의 연합인 WIN이 7월 초 22개국 2만1088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각국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신뢰도(10점 만점)는 국가별로 큰 차이가 났다. 중국(7.2) 인도(6.3) 브라질(6.1)은 정부 신뢰도가 높은 수준을 보인 반면 아이슬란드(4.0) 스페인(3.8) 영국(3.3) 일본(3.3) 등의 신뢰도는 최하위권이었다. 경제 성적표에 따라 정부 신뢰도도 양극화한 것이다.

민심도 설문조사 결과와 비슷했다. 인도의 5월 총선에선 집권연정인 통일진보연합(UPA)이 야당을 누르고 압승했다. 뉴델리에 사는 회사원 시암 선더 씨(33)도 UPA 후보를 찍었다. 그는 “국민은 현 정부의 감세와 인센티브 등 경기부양책에 크게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

내년 10월 대선을 앞둔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 지지율은 70%대의 고공행진 중이다. 2005년 측근 비리 사건으로 30%대까지 추락했던 지지율은 순조로운 경제 회복으로 임기 말이 될수록 오르고 있다.

자동차대리점을 운영하는 호드리구 보르제스 씨(29)는 룰라 정부의 정책으로 큰 이득을 봤다. 자동차에 부과된 공업생산세를 낮춰준 덕택에 경제위기에도 자동차 판매는 오히려 늘었기 때문이다. 그는 “원래 룰라 대통령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경제위기에 대한 대응은 잘했다고 생각한다”며 “특히 소비 진작을 위한 세금감면 조치로 브라질은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고 말했다.

신흥대국의 국민은 이제 자부심을 넘어 선진국에 대해 훈계까지 하고 있다. 인도 뉴델리의 자동차 판매업자 라빈더 세드 씨(54)는 “이번 기회에 선진국 국민에게 절약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며 “우린 빈곤 속에서도 잘사는데, 그들은 왜 아낄 줄 모르나. 그들은 항상 자기 능력 이상을 쓰려고 한다”고 꼬집었다.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미국계 은행 지점장으로 근무하는 발디네이 알베르투 씨(39)는 “브라질 은행들은 1990년대 금융위기를 겪은 뒤 은행의 건전성 기준을 높인 덕에 이번 경제위기의 피해를 거의 보지 않았다”며 “글로벌 경제위기는 결국 경영진과 월스트리트 직원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무작정 대출을 늘린 미국 은행들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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