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급쟁이 선박? ‘무급휴직’에 ‘조기명퇴’도

  • 입력 2009년 8월 22일 02시 58분


《‘불황기 대형 선박과 직장인의 처지는 닮은꼴?’

작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조선업은 큰 타격을 받았다. 배를 주문하는 데 필요한 금융 시스템이 마비됐기 때문이다.

개인 소비를 장려하는 각국 정부의 정책으로 조금씩 온기가 돌기 시작한 자동차산업과 온도 차가 크다. 》

무급휴직- 물동량 줄어 바다위에서 ‘노는 배’ 늘어
조기명퇴- 오래된 배 폐기 시기 예전보다 빨라져
임금삭감- 아시아∼유럽 노선 운임 4분의 1로 ‘뚝’

21일 조선시황 전문 조사기관인 클락슨에 따르면 지난해 1∼7월에는 세계 선박주문량이 1495척, 1억1030만 DWT(재화중량톤수·선박에 실을 수 있는 총화물의 중량)였지만 올해 같은 기간은 151척(1030만 DWT)에 그쳤다. 거의 10분의 1로 줄어든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기존 대형 선박의 처지도 여러 면에서 불황기 직장인의 모습과 비슷해졌다.

첫째, 무급 휴직하는 배가 늘어났다. 세계 물동량이 줄어드는 바람에 실어 나를 화물이 없는 배는 쉬어야 한다. 이런 배는 항구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공해상에 둥둥 떠 있다. 항구에 두면 자동차가 주차료를 무는 것처럼 정박료를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해운 전문 컨설팅 업체인 알파라이너에 따르면 이런 배(계선)는 화물 적재량을 기준으로 작년 10월 15만 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의 적재량)에서 올 5월 120만 TEU로 8배로 늘어났다. 전 세계 컨테이너선 10척 중 1척은 일 없이 노는 무급휴직 상태인 셈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최근 국내 기업들의 고용 유지 해법이었던 ‘일자리 나누기’도 등장했다. 현대상선 관계자는 “원래 배 5척이 시속 80km로 운항하던 항로를 6척이 시속 60km로 운항하도록 바꿔 연료소비효율을 높이고 ‘노는 배’를 없애는 묘안도 등장했다”고 전했다.

둘째, 조기 명예 퇴직하는 배도 늘어났다. 오래된 선박을 폐기하는 시기가 예전보다 빨라진 것. 클락슨에 따르면 퇴역 선박의 평균수명은 작년 30.5세에서 올해 7월 현재 29.0세로 1.5세 젊어졌다. 올 7월 퇴역한 23척의 대형 선박 가운데 1980년대에 태어나 아직 20대인 선박은 14척이나 된다. 취업난과 조기 명퇴로 ‘삼팔선’(38세면 퇴출), ‘사오정’(45세 정년), ‘오륙도’(50, 60대까지 근무하면 도둑)라는 유행어를 낳은 불황기 직장인들의 세태와 많이 닮아 있다.

셋째, 임금이 동결되거나 삭감됐다. 해운업계에 따르면 물동량 감소로 인해 한때 약 4000달러(40피트 컨테이너 기준)였던 아시아∼유럽 노선의 운임이 현재 1000달러까지 폭락한 상태다. 국내 해운업계는 최근 “현 운임으로는 적자를 벗어나기 어렵다”며 운임 인상을 추진 중이다. 일반적으로 할증료가 붙는 하반기(7∼12월)에 운임을 올리지 못하면 심각한 경영난에 빠질 것이라는 위기감이 크다. 이에 따라 해운업계는 운임을 최대 100% 인상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대해 수출기업들은 “수출 경쟁력을 해칠 수 있다”며 반발하는 분위기다.

해운업계의 한 관계자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신규 수주한 컨테이너선이 워낙 많아 수요는 적고 공급은 과잉인 상태”라며 “수요가 늘어난다고 해도 계선 중인 선박이 새로 투입되기 때문에 운임을 인상하려면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용석 기자 nex@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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