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내수 ‘역주행’에 정부-정치권 늑장대응

  • 입력 2009년 1월 23일 02시 58분


글로벌 경제위기의 여파로 수출입 최전선에 있는 부산항의 물동량도 크게 줄었다. 그동안 부지런히 수출입 화물을 실어 나르던 중소형 화물선들이 경기침체로 부산 남외항에 정박해 있다. 부산=연합뉴스
글로벌 경제위기의 여파로 수출입 최전선에 있는 부산항의 물동량도 크게 줄었다. 그동안 부지런히 수출입 화물을 실어 나르던 중소형 화물선들이 경기침체로 부산 남외항에 정박해 있다. 부산=연합뉴스
■ 한국 경제 가파른 ‘경착륙’ 원인은

3분기대비 수출 ―11.9% 제조업 ―12%… 통계 38년만에 최악

소비도 ‘자산 디플레’로 4.8% 줄어 환란이후 가장 큰폭 감소

실물침체→기업-가계 소득감소→금융시장 불안 악순환 조짐

22일 수치로 확인된 지난해 4분기의 ‘성장률 쇼크’는 한국 경제가 이미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거대한 태풍의 한복판에 빨려 들어갔음을 보여준다.

외환위기 이후 최악인 전 분기 대비 ―5.6%의 성장률은 지난 3개월간 경제주체들이 겪었던 경기침체의 고통이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심각했다는 뜻이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는 세계 경제의 성장 엔진으로 자리 잡은 중국 덕분에 선진국 경기침체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디커플링(decoupling) 이론’은 근거 없는 희망에 불과했다.

○ 수출 투자 소비의 역주행

지난해 9월 중순 미국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후 세계 금융시장이 요동을 쳤고 미국 유럽 등 선진국은 급격한 소비침체에 빠졌다. 세계 경제가 출렁이면 수출 의존도가 높고 소규모 개방 경제인 한국은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다. 수출이 곧바로 급락했고 허약한 국내 금융시장과 내수 기반은 외부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빠르게 무너졌다.

선진국은 물론 신흥시장까지 침체에 빠진 지난해 4분기 한국의 상품 수출 및 제조업 성장률은 전기 대비 각각 ―11.9%, ―12%로 나타나 1970년 관련 통계가 작성된 이후 가장 큰 폭으로 감소했다.

이 기간에 원-달러 환율은 평균 1364.31원으로 2007년 4분기 평균 환율(920.61원)보다 48.2% 높았다. 원화 가치가 크게 떨어져 수출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됐는데도 메가톤급 외부 악재에 치여 수출이 오히려 급감한 것이다.

배상근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제본부장은 “한국 경제는 부품 등 자본재 수입 비중이 높고 수출도 고부가가치 상품 중심이어서 환율보다 세계 경기에 더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다”고 말했다.

수출이 잘 안 풀릴 때 대신 경제를 떠받쳐 줘야 할 내수가 허약한 점도 성장률 추락의 원인이다. 지난해 4분기 민간소비는 3분기보다 4.8% 감소해 외환위기 이후 가장 큰 폭으로 줄었다.

국제유가 급등으로 교역조건까지 나빠져 지난해 실질소득이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감소한 것도 소비 위축을 불렀다.

○ 신용경색과 실물경제 위축 악순환

실물경제의 악화와 함께 자금시장이 혼돈에 빠진 것도 경제위기의 충격파를 키웠다.

지난해 4분기는 세계 금융시장의 불안이 국내 금융시장으로 옮겨 붙고, 그 파장이 다시 실물경제로 확산되는 시기였다. 자산 건전성이 나빠진 은행들이 시중에 돈을 풀지 않으면서 경기침체와 ‘돈 가뭄’이라는 이중고(二重苦)에 직면한 기업들은 생산과 고용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가계 역시 단기간에 급증한 주택담보대출의 원리금 상환 부담이 큰 상태에서 부동산과 주식의 자산가치까지 급락하자 지갑을 닫았다.

경제 전반에 ‘축소 균형’이라는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홍은미 한화증권 강남금융센터장(상무)은 “자금이 펀드에 몰린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경제위기가 닥치니 어려울 때 소비를 해줘야 할 중산층과 일부 부유층마저 지출을 줄였다”고 설명했다. 이른바 ‘역(逆) 자산효과’다.

최근에는 금융시장 불안이 ‘실물경제 침체→기업과 가계의 소득 감소→금융기관 연체율 급등→금융시장 불안’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말 국내 은행의 원화대출 연체율은 1.08%로 2007년 말 대비 0.34%포인트 상승했다. 기업 대출의 연체율도 전년 말보다 0.54%포인트 오른 1.46%로 집계됐다.

○ 정부의 실기와 정치권의 발목 잡기

성장률 쇼크는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른 수출 감소와 내수 위축, 정부 정책 대응의 실기(失機)라는 세 가지 경제 변수에 예산안 처리와 경제 살리기 관련 법안에 늑장을 부린 정치권의 비협조가 가세한 합작품이다.

경제가 벼랑 끝에 몰렸는데도 정부는 이달 중순이 넘어서야 기업 구조조정의 틀을 잡을 정도로 대처가 늦었다. 한국은행과 금융 당국은 늑장 대응과 엇갈린 신호로 시장의 혼선을 키웠다.

지난해 8월 기준금리를 높였던 한은은 9월 15일 리먼브러더스 사태가 터진 후에도 금리 인하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다가 10월 말에야 기준금리를 대폭 낮추고 단기 유동성을 풀기 시작했다.

구희진 대신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정부 당국자들이 시장 상황을 너무 낙관하고 있다”며 “국내외에서 신속한 기업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퇴출되는 기업은 2곳에 불과할 정도로 구조조정 메커니즘에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박용 기자 parky@donga.com

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

▼ 한국경제 예상보다 가파른 추락 ▼

작년 4분기 성장률 3분기 대비 ―5.6%

지난해 4분기(10∼12월) 한국경제가 큰 폭의 마이너스 성장을 하면서 외환위기 이후 최악의 성적표를 받았다.

세계경제의 버팀목으로 기대됐던 중국이 7년 만에 가장 낮은 성장률을 보이는 등 글로벌 경기침체로 주요국 경제가 동시에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4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3분기보다 5.6%, 2007년 같은 기간보다 3.4% 하락했다고 22일 밝혔다.

전분기 대비 성장률은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 1분기(―7.8%) 이후 최악이고 전년 동기 대비로는 1998년 4분기(―6.0%) 이후 가장 낮은 것이다.

경제성장의 3대 축인 상품수출, 민간소비, 설비투자가 각각 3분기보다 11.9%, 4.8%, 16.1% 감소하면서 경제성장률을 큰 폭으로 끌어내렸다.

업종별로는 제조업 생산이 반도체, 철강, 자동차 등 주요 업종의 감산으로 3분기보다 12% 줄어 1970년 관련 통계가 작성된 이후 최악의 감소세를 보였다.

4분기 성장률이 예상보다 큰 폭으로 하락하면서 지난해 연간 GDP는 2007년보다 2.5% 성장하는 데 그쳤다. 1998년(―6.9%) 이후 최저치다.

교역 조건을 반영한 실질 국내총소득(GDI)은 지난해 4분기에 전분기보다 2.9% 감소해 연간 기준으로 2007년보다 2.1% 줄었다. 국민의 소득 여건을 보여주는 지표인 GDI는 1998년(―7.2%) 이후 10년 만에 처음으로 뒷걸음질쳤다.

최춘신 한은 경제통계국장은 “속보치를 기준으로 대략 계산해보면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 이하로 떨어졌다”며 “올해 3월 기준년이 달라진 통계가 적용되면 2만 달러 언저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해 11월에 내놨던 올해 세계 경제성장률 전망치(2.2%)를 29일경 또다시 큰 폭으로 낮추기로 했다.

강석훈 성신여대 교수는 “이런 추세라면 올해 연간 성장률이 마이너스로 가고 세계경제의 회복 시점도 늦춰질 수 있다”며 “정부가 추경예산을 편성해 재정지출을 크게 늘리고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공적자금을 선제적으로 조성하는 등 지금보다 과감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용 기자 parky@donga.com

정재윤 기자 jaeyu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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