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가는 ‘디지털 코리아’

  • 입력 2008년 12월 9일 03시 00분


구형 게임기가 신형보다 더 비싸다?

불법 다운로드 차단 신제품 소비자가 외면

PSP 최신모델 21만원… 구제품은 26만원

《일본 소니가 최근 성능을 개선해 내놓은 휴대용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포터블(PSP) 신(新)모델이 지난해 9월 출시된 예전 모델보다 더 싸게 팔리는 이상한 현상이 국내시장에서 나타나고 있다.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 용산전자상가 내의 한 게임기 판매 코너. 한 가게에서 판매 중인 PSP 최신 모델인 ‘PSP-3005’의 가격은 21만 원이었다. 그러나 구(舊)모델 ‘PSP-2005’는 액정화면의 화질, 마이크 성능,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 수신 성능이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가격이 26만 원으로 5만 원 더 비쌌다.》

다른 대부분의 가게에서도 구모델이 신모델보다 5만 원 가까이 비싸게 팔리고 있었다. 두 제품의 정가(定價)는 22만8000원으로 같다.

판매 가격에서 차이가 나는 이유를 묻자 “‘3005’는 불법 복제 게임이 구동되지 않아 값비싼 정품 게임을 구입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PSP 이용자들은 일명 ‘커펌(커스텀 펌웨어)’이라고 불리는 운영체제(OS)를 설치한 뒤 불법 복제한 게임을 이용하는데 새로 나온 ‘3005’ 제품은 이 방법을 쓸 수 없기 때문에 게임기 가격이 더 싸다는 설명이었다.

한 상인은 “‘2005’ 제품의 몸값이 치솟아 요즘엔 없어서 못 팔 지경”이라며 “3005 시리즈는 누군가 기술적으로 뚫지(불법 복제에 성공하지) 않는 한 아마 계속 잘 안 팔릴 것 같다”고 털어놨다.

일본 닌텐도의 휴대용 게임기 ‘닌텐도DS 라이트’도 한국에선 ‘R4’ 등 게임 불법 복제 칩이 판을 치면서 게임기 대당 정품 게임팩이 2개도 채 안 팔리는 ‘한국적 현상’에 시달리고 있다.

한국닌텐도 관계자는 “세계적으로는 하드웨어 본체 대당 게임팩이 평균 5.39개 팔리고 있다”며 “게임업체의 수익은 주로 게임팩 판매에서 나오는데 한국에선 게임팩 불법복제로 인한 피해가 너무 크다”고 말했다.

불법 복제로 인한 특이한 시장 현상은 게임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콘텐츠 시장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미국 워너브러더스는 최근 올해의 최고 히트작인 ‘다크나이트’를 한국 시장에서만 DVD가 아닌 인터넷TV(IPTV)로 먼저 공개하기로 했다. 이 회사는 미국에선 수익 극대화를 위해 DVD를 발매한 뒤 IPTV 등의 주문형비디오(VOD)로 공급하고 있다.

회사 측은 “한국시장의 온라인 환경이 잘돼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불법 다운로드의 영향도 배제할 수 없다”며 “한국은 불법 다운로드가 많아 영화 개봉 후 VOD로 전환하는 속도를 앞당길 필요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워너브러더스, 파라마운트, 소니픽처스 등 메이저 할리우드 배급사들이 모두 한국 DVD 직접 배급을 줄줄이 포기한 것도 불법 복제의 영향이 크다.

저작권 전문가들은 “한국에서 아직까지 e북(전자책)이 활성화되지 못한 것은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출판업자들이 불법 복제를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대희 고려대 법대 교수는 “무한복제가 가능한 디지털 시대를 맞아 콘텐츠 시장의 변화가 한국에서 상대적으로 빠르게 일어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며 “하지만 불법 복제는 콘텐츠 산업의 붕괴를 촉진하기 때문에 새로운 일자리 창출을 막는 등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김용석 기자 nex@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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