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企 “담보-신용보증서 들고 가도 대출 박대”

  • 입력 2008년 11월 11일 02시 58분


금융당국 “中企지원 실적 점검 책임 물을 것” 은행 압박

시중은행 “자본확충 어려운데 무턱대고 대출 늘릴수야”

반도체 부품 생산업체 자금부장 김모 씨는 요즘 밤잠을 설친다. 운전자금 10억 원을 마련할 길이 막막해서다. 김 씨는 “상반기까지만 해도 신용대출로 100억 원씩 빌려주던 은행이 지금은 담보를 잡아도 어렵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며 “정부 대책을 믿을 수 없어 자산 매각을 알아보는 중”이라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10일 “일선 은행들이 과연 필요한 돈을 제때 풀어주고 있는지 걱정”이라고 은행권을 강도 높게 압박해야 할 만큼 중소기업과 가계의 ‘돈 가뭄’은 심각하다.

수익성과 건전성이 악화되고 있는 은행도 위험이 따르는 중소기업이나 가계 대출을 쉽사리 늘리지 못하고 있다. 바짝 마른 돈줄을 둘러싸고 금융당국-기업-은행이 ‘삼각 갈등’을 빚고 있는 것이다.

○ 中企 “돈 구할 데 어디 없나요”

시중 은행들은 건전성 악화를 막기 위해 중소기업과 가계의 신규 대출을 자제하거나 만기 연장에 대한 심사기준을 강화하고 있다.

10월 은행의 기업 대출은 전달보다 7조5000억 원 늘어 9월(5조 원)보다 증가폭이 확대됐다. 늘어난 대출액 중 중소기업 몫은 2조6000억 원. 나머지는 대기업으로 갔다. 10월 들어 중소기업 대출이 약간 늘었지만 2007년 전달 대비 월평균 5조4000억 원, 올해 1∼6월 5조7000억 원 늘어난 것과 비교하면 여전히 큰 폭으로 감소한 것.

신용보증기금의 한 관계자는 “은행들이 대출 승인을 해주지 않아 신보의 보증조차 받을 수 없다고 하소연하는 기업이 적지 않다”며 “일선 은행이 ‘신보 보증을 받아도 대출을 안 해 주겠다’고 얘기하는 상황은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신용등급이 낮은 중소기업들이 자본시장에서 회사채나 기업어음(CP)을 발행해 직접 자금을 조달하기도 쉽지 않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해 1∼8월 BBB등급 이하 회사채 발행은 전체 회사채의 16.4%를 차지했지만 9월에는 5.3%로 급감했다. 신용등급이 떨어지는 회사의 회사채 발행이 막힌 것이다.

수출입 기업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은행들이 해외에서 1년 미만의 단기 달러 자금을 들여와 은행의 수출환어음 매입이나 수입대금을 결제해 줬는데 달러가 부족해지자 무역금융 거래를 줄이고 있는 것.

한 은행권 자금담당 임원은 “중소기업에 대한 충격을 줄이기 위해 상대적으로 외화 유동성이 풍부한 대기업 계열사나 중견기업부터 무역금융 거래 규모를 우선 줄이고 있다”면서 “정부가 달러 유동성을 제공하고 있지만 아직 ‘달러 가뭄’이 완전히 해갈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 “비 올 때 우산 빼앗지 마라”

청와대는 매일 금융권의 중소기업 지원 상황을 보고받는 등 추진 상황을 챙기고 있다. 이에 따라 금융당국은 중기 대출을 늘리도록 은행에 대한 압박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전광우 금융위원장과 김종창 금감원장은 5일 시중 은행장들을 비공개로 만나 중소기업 지원 확대를 주문했다.

이 자리에서 전 위원장은 “정부가 다양하고 과감한 조치를 취했지만 기업체들은 아직도 많은 금융 거래상의 어려움을 호소한다”고 지적했고, 김 원장은 “은행의 지원실적 등을 철저히 점검해 은행장을 포함한 임직원에게 분명한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이와 동시에 금감원은 각 은행에 은행채, 양도성예금증서(CD) 등 ‘시장성 수신’을 줄이는 등의 내용이 담긴 양해각서(MOU)를 제출받았다. 금융당국은 시장성 수신을 이용한 ‘몸집 불리기’가 은행의 건전성과 자금 조달을 악화시켜 결과적으로 중기 자금줄이 말라가고 있다고 보고 있다. 한은 관계자는 “은행채를 매입할 때 시장성 수신이 많은 은행에 불이익을 줄 계획”이라고 말했다.

○ 제 앞가림에 바쁜 은행들

수익성과 건전성이 떨어지고 있는 은행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다. 신보 보증을 받아 기업 대출을 해줘도 신보 보증률(80∼85%)을 초과하는 리스크는 은행이 져야 한다. 정부가 신보의 보증률을 95%로 올리기로 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한 시중 은행 자금담당 부장은 “일시적인 자금난에 빠진 우량 중소기업은 어떻게든 살리려고 하지만 부실 기업까지 ‘무임승차’하려 들어 문제”라며 “신용위험이 높은 일부 중소기업에 대출을 거절했다가 ‘당국에 고발하겠다’는 고함까지 들은 직원이 있다”고 말했다.

은행들은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의 자기자본에 포함되는 후순위채를 대량으로 발행할 준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시장이 경색된 상황에서 후순위채가 얼마나 팔릴지 불확실하고, 8%대의 높은 금리도 부담이 된다. 이 때문에 정부는 한국산업은행 등 국책은행의 자본을 확충해 은행의 후순위채를 매입해 주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은행의 주인인 주주들이 유상증자 등을 통해 자본을 늘릴 수 있지만 국내 은행들의 지분이 지나치게 분산돼 자본 확충을 주도할 대주주가 없다는 점도 걸림돌이다.

시중 은행의 고위 관계자는 “재일교포 주주가 많은 신한금융지주를 제외한 나머지 은행들이 금융위기 상황에서 유상증자 등을 통해 자본을 모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박용 기자 parky@donga.com

정재윤 기자 jaeyuna@donga.com

류원식 기자 rew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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