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러기 아빠 “송금 괴로워”…장롱달러 보유자 “환전 즐거워”

  • 입력 2008년 10월 10일 02시 54분


자녀 유학보낸 기러기 아빠 ‘허리 휘청’

‘장롱달러’ 보유자 환차익 ‘표정 관리’

○ 조기귀국 고민하고 해외여행 연기

아내는 일부러 밝은 척하는 것 같았다. “애들은 잘 지내. 나도 오랜만에 강의실에 앉아 보니 너무 재밌고….” 2년째 ‘기러기 아빠’ 신세인 최태준(48·서울 서초구 방배동) 씨. 지난 주말 캐나다 토론토에서 유학 중인 아내와 인터넷 화상전화를 했다. ‘환율이 너무 뛰니 내년엔 귀국하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결국 못했다.

재작년 미국에 교환교수로 나갔던 김모 씨는 지난해 아내와 자녀를 현지에 두고 혼자 귀국했다. 처음엔 외로운 게 문제였지만 지금은 자금난이 더 큰 문제다.

그는 “매달 3500∼4000달러를 송금해 왔는데 이번 달에는 80만 원 정도 더 들었다”며 “한꺼번에 환전을 해 둘 목돈이 없으니 매일 치솟는 환율이 무섭다”고 말했다.

현지에 있는 지인을 통해 들은 얘기로는 아내도 사정을 잘 안다. 아내가 “원-달러 환율이 1400원대에 이르렀으니 생활비 보내기가 얼마나 힘들까. 이제 귀국해야겠다”고 말하더라고 했다. 유학생의 한숨도 깊어지고 있다. 영국에서 비정부기구 인턴으로 일하면서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는 박세연(28) 씨. 그는 “한국에서 보내주시는 생활비는 100만 원 정도로 고정돼 있는데 최근 체감 물가는 2배가량 뛰었다”며 “대학생들도 아르바이트를 구하느라 비상이고 교재를 제때 사지 못하는 친구들도 있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을 대상으로 조기유학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D유학원에는 최근 귀국 시점을 상담하는 고객 문의가 하루 2, 3건씩 들어온다. 2, 3년 과정으로 미국이나 필리핀으로 자녀를 유학 보낸 학부모 중 체류 기간이 1년 정도 된 사람들이 자녀를 불러들이려는 사례가 많다.

회사원 정모(26) 씨는 지난달 12일 자동차를 사면서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생이 대학에서 받은 장학금 6000달러를 빌렸다. 당시 원-달러 환율은 1100원 선으로 660만 원을 빌린 셈이었지만 지금 환율로는 800만 원이 넘는다.

정 씨는 “동생에게 잠시 돈을 빌렸다가 이달 말 만기가 돌아오는 적금으로 갚으려 했는데 환율 급등으로 적금을 중간에 깨느니만 못하게 됐다”고 푸념했다.

회사원 손모(31) 씨는 작년 말부터 계획했던 뉴욕 여행을 연기해야 할 판. 이달 말 유학 중인 남자친구를 만나러 갈 꿈에 부풀어 있었지만 예산이 70만∼80만 원 정도 늘어나 고민이다.

○ 달러 외화보험 해약으로 수익 챙겨

집에 달러를 갖고 있거나 달러 표시 금융상품에 가입했던 이들은 요즘 ‘표정관리’ 중이다.

국내외를 오가며 사업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던 달러 뭉치나 해외여행을 한 뒤 장롱 속에 넣어둔 소액의 달러를 환전해 차익을 올린다.

우리은행 정병민 테헤란로지점 PB팀장은 “하루 5, 6건씩 환전을 하는데 많게는 50만 달러 이상을 원화로 바꿔 가는 사람도 있다”고 귀띔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사는 정모(50) 씨는 최근 2005년 8월 50만 달러에 가입한 외화보험을 해약했다. 만기 전이라 해약환급금은 49만3700달러밖에 되지 않았지만 원화로 환전해서 받은 돈은 원금보다 32.6% 늘어나 있었다. 하지만 환율 급등을 즐기는 사람은 극소수. 대부분은 이 현실이 낯설고 두렵다.

최근 유동성 문제가 불거진 미국계 금융회사에 근무하는 한 임원은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 딸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와 ‘아빠 괜찮아요? 저 장학금 꼭 받을게요’라고 했다”며 “하루아침에 딴 세상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류원식 기자 rews@donga.com

홍수용 기자 legman@donga.com

김희균 기자 foryo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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