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크 실체 확인…‘한국형 IB’ 타산지석 삼아야”

  • 입력 2008년 9월 18일 02시 59분


■ 금융권 ‘IB 유비무환론’

“정보공시 - 건전성 감독 강화해야”

정부 일각선 ‘속도조절론’도 나와

한국 금융업의 선망의 대상이던 미국 투자은행(IB)들이 줄줄이 무너져 내리면서 국내 금융권과 정부 일각에서 ‘IB 속도 조절론’이 흘러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과거로 U턴’하는 전환점이 아니라 타산지석으로 삼아 ‘한국형 IB 모델’을 정립하는 출발점으로 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한국 금융업계가 IB 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전에 이 같은 대형 사태가 터진 게 ‘불행 중 다행’이라는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메릴린치에 대한 투자를 통해 많은 교훈을 얻었다.” 진영욱 한국투자공사(KIC) 사장은 올해 7월 기자간담회에서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에 대한 투자 의사를 묻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미국 IB의 이면에 감춰진 위험의 실체를 올해 20억 달러의 메릴린치 투자를 통해 확인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정부 일각에서는 금융산업 체질을 IB 중심으로 개편하는 전략에 대한 ‘속도 조절론’도 나온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번 사태는 한국 금융산업의 체질이나 체급을 고려하지 않은 채 IB로 전환하는 것이 위험할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고 강조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한국 정부와 금융시장이 보유한 국제 금융권에 대한 인적 네트워크가 우리 경제 수준에 비해 터무니없이 약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며 ‘선(先) 체력 강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금융가에서는 “과거 회귀의 핑계로 삼을 것이 아니라 리스크 관리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쪽의 목소리가 주류다. 윤만호 산업은행 이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리스크를 감안한 투자은행 활동이지 리스크를 테이킹(감내)하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국내 증권사의 IB 사업 수익 비중은 5%에 불과하다”며 “은행계 금융지주회사도 은행사업 비중이 80% 이상이어서 IB 분야로의 사업 다각화는 필수”라고 말했다.

다만 금융회사에 대한 정보 공시와 건전성 감독을 강화해 유사한 사태가 한국에서 터지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것. 세계적인 IB 출신의 한 금융권 간부는 “돈을 버는 부서의 힘이 강해지고 리스크 담당자의 권한이 약해진 게 이번 사태의 원인”이라며 “위험 관리와 고객에게 충실한 ‘전통적인 IB 모델’의 복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인수합병(M&A) 등 IB 본연의 사업 모델은 미래 성장동력으로 유효하며 뒤집어 생각하면 지금이 세계적인 IB를 사들여 국제경쟁력을 갖출 적기라는 견해’도 여전하다.

국내 금융산업의 지향점을 재점검하고 ‘한국형 IB 모델’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도이체은행이나 JP모간처럼 탄탄한 고객 수신 기반과 기업금융 인프라를 갖춘 상업은행에 바탕을 둔 IB가 대안이 될 수도 있다. 최근 문제가 된 미국의 IB들은 자체 수신이나 기업 고객 기반이 약해 금융시장의 불안에 특히 취약했다.

조급증부터 버려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신보성 한국증권연구원 금융투자산업실장은 “자본시장통합법만 통과시키고 사람 몇 명 데리고 온다고 해서 IB가 만들어지지는 않는다”며 “리스크 관리 인프라, 연구 역량, 해외 네트워크 등을 인내심을 갖고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박 용 기자 parky@donga.com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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