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멀고… 엔진은 식고

  • 입력 2006년 11월 30일 03시 01분


코멘트
《공장 자동화설비를 생산하는 H사는 올해 단 한 푼도 신규 투자를 하지 않았다. 앞으로 3, 4년간 투자할 계획도 없다. 연간 매출 2000억 원 규모인 이 회사는 2004∼2005년 100억 원가량을 들여 생산 시설을 늘리고 물류 시설도 확충했다. 하지만 자동화설비를 주문하기로 했던 기업들이 신규 사업 계획을 취소하거나 연기하면서 타격을 보게 됐다.》

2001년 이후 설비투자 증가율 평균 1.2%… 1990년대엔 11%

‘불황 장기화→소비재 산업 투자 기피→생산재 산업 투자 기피’라는 투자의 악순환이다. H사 관계자는 “경기가 불투명하고 나라 안팎의 사정도 불확실해 거래처 기업들이 투자를 줄이거나 보류하는 바람에 올해 매출이 20%나 줄었다”며 “투자금 회수도 어려운 상황에서 신규 투자를 하는 것은 엄두도 못 내고 있다”고 말했다.

기업들의 설비투자가 정체되면서 ‘한국호(號)’의 성장엔진이 식어 가고 있다. 특히 최근 경기 부진과 기업 규제에다 북한 핵실험과 정권의 불안정까지 겹치면서 내년에는 기업의 투자심리가 더 위축될 것이란 전망이 많다.

경제 전문가들은 “수도권 아파트 공급 부족이 집값 폭등을 불러온 것처럼 장기간의 저투자는 성장 동력의 훼손으로 이어진다”며 “지금 같으면 다음에 누가 집권해도 성장잠재력 복원에는 고생이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고 우려한다.

○ 내년 투자 전망도 밝지 않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01∼2005년 기업의 설비투자 증가율은 연평균 1.2%에 그쳤다. 1991∼95년의 평균 11.8%와 대비하면 10분의 1에 불과하다.

내년 투자 전망도 밝지 않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서울 소재 300개 기업을 대상으로 내년 투자계획을 조사한 결과 기업들의 전체 투자 증가율은 3.7%에 그칠 것으로 전망됐다. 기업들은 투자 걸림돌로 ‘경기 부진’(59.7%), ‘정책 불확실성과 규제’(18.8%), ‘자금난’(12.3%), ‘고수익 투자처 감소’(7.8%) 등을 꼽았다.

특히 대기업들은 금고에 수천억∼수조 원씩을 쌓아두고도 신규 사업에 대규모 투자를 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에 따르면 9월 말 현재 상장 기업들의 현금성 자산은 52조6500억 원. 1조 원의 투자가 연간 3조3000억 원의 국내총생산(GDP) 유발 효과가 있는 것을 감안하면 투자가 10조 원만 늘어도 전체 GDP는 33조 원이나 증가한다.

대한상공회의소 이현석 상무는 “기업의 투자는 미래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전제로 이뤄지는데 경기 부진, 행정 규제, 노사 분규, 정책 불확실성 등으로 기업들이 현찰을 손에 쥐고 관망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 해외 직접투자는 급증세

국내 투자가 지지부진한 가운데 해외 직접투자는 꾸준히 늘고 있다.

올해 현대자동차의 해외 설비투자액은 국내 투자액 4421억 원의 4배에 가까운 1조5200억 원이다. 국내에는 울산 5공장과 엔진공장을 증설하는 데 그쳤지만 인도와 중국에는 대규모 ‘제2 공장’을 지은 것이다.

현대차는 지난해에도 국내에 651억 원을 투자했지만 미국 앨라배마 공장에는 1조716억 원을 쏟아 부었다. 현대차 측은 “내수 판매는 2002년 165만 대를 정점으로 지난해 110만 대로 줄었다”며 “추가 수요가 없어 대규모 투자를 못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국내 기업의 해외 직접투자는 최근 5년간 크게 늘었다. 올해는 9월까지만 이미 지난해 연간 해외직접투자액(67억1974만 달러)보다 11% 늘어난 74억5507만 달러가 해외에 투자됐다.

오문석 LG경제연구원 상무는 “정부는 정책 불확실성을 없애고 과감히 규제를 풀어 기업이 투자에 나서도록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클릭하면 큰 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박정훈 기자 sunshad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