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브랜드]아모레 향기, 파리를 흔들다

  • 입력 2006년 9월 4일 03시 00분


코멘트
“무슨 옷을 입고 잠자리에 드시죠?”

“샤넬No 5, 다섯 방울이죠.”

미국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섹시 스타였던 메릴린 먼로는 한 기자의 짓궂은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샤넬이 가장 좋아했다는 다섯 번째 샘플은 일약 최고의 향수로 떠올랐고 지금도 그 영광을 지키고 있다. 디자이너 위베르 드지방시의 향수 ‘랭테르디(L’Interdit)’는 프랑스어로 ‘금지’를 의미한다. 1957년 그가 배우 오드리 헵번에 대한 우정과 사랑의 징표로 만든, 그녀만을 위한 향수다.

향수 브랜드는 살아 숨쉬는 생명체다. 스타와의 만남, 이런 저런 사연과 에피소드를 거치면서 그 향기가 더욱 짙어진다. 1997년 글로벌 향수 브랜드의 높은 벽을 뚫고 인기를 얻은 ‘롤리타 렘피카’. 이 브랜드는 지금 프랑스에서 샤넬No 5나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자도르 등과 당당히 겨루면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고 있다. 2004년 말 롤리타 렘피카의 프랑스 향수시장 점유율은 2.8%로 4위. 향수의 대명사로 불리는 샤넬 No 5의 점유율도 4% 안팎에 불과하다. 롤리타 렘피카는 ‘아모레퍼시픽’이 프랑스 현지법인을 통해 내놓은 브랜드다. 향수의 본 고장에서 ‘명품(名品)’으로 성장하고 있는 ‘그녀’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클릭하면 큰 이미지를 볼 수 있습니다.
1997년 첫 선을 보인 롤리타 렘피카는 ‘향수 천국’ 프랑스를 매혹시키며 명품 향수로 대접받고 있다. 판타스틱한 세계와 페미니티를 담은 이미지 포스터. 사진제공 아모레퍼시픽
(▲이미지를 클릭하신 후 새창 우측하단에 있는 를 클릭하시면 큰 이미지를 볼수 있습니다.)


○ 그녀를 말한다-롤리타 렘피카

그녀는 1997년 최우수 여성향수(프랑스 향수재단), 1999년 최우수 여성향수(미국 향수재단)로 뽑혔다. 2001년 내놓은 같은 브랜드의 남성용 향수도 프랑스 최우수 남성 향수 및 최우수 용기 디자인상을 받았다. 향수 격전지 프랑스에서는 한해 100여 종의 향수가 등장하지만 대부분 1년을 버티지 못하고 사라진다.

이처럼 경쟁이 치열하지만 롤리타에 대한 프랑스 소비자들의 반응은 놀라우리만치 호의적이다. 지난해 매출은 3400만 유로(약 481억6500만 원)로 전 세계 90여 개국에서 팔렸다. 프랑스가 총 매출의 60%를 차지한 반면 한국 시장 비율은 2, 3%에 불과하다. 브랜드는 동화를 연상시키는 순수함과 관능미가 함께 드러나는 작품 세계로 유명한 디자이너 롤리타 렘피카의 이름을 그대로 썼다. “성숙한 여성의 오리엔털 이미지와 소녀의 순수한 이미지가 겹쳐진다”는 게 패션지 ‘엘르’의 평가다.

“디자이너의 이름만 사용한 게 아니라 작품의 이미지와 감각 등 디자이너의 크리에이티브를 살린 것이 가장 큰 성공 요인이다. 당시 향수 시장의 유행은 남녀가 함께 사용하는 유니섹스 타입이었지만 우리는 페미니즘을 앞세운 틈새 전략을 취했다.”(카트린 도팡 태평양 유럽본부 부사장)

향수의 이미지를 좌우하는 향수병 디자인은 수집품이 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녀는 금단의 사과 이미지로 형상화됐다. 보라색 바탕에 아이비 잎으로 수줍게 ‘몸’을 가렸고, 윗부분은 금색의 사과 꼭지로 치장했다. 향수의 분사기 부위는 대부분 튼튼하고 투박한 형태였기 때문에 사과 꼭지 형 분사기는 화제가 됐다.

최고의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현지에서도 인정받는 ‘드림팀’이 필요했다. ‘이브 생 로랑’ ‘유니레버’ 등에서 일한 도팡 부사장이 마케팅을, ‘랑콤’에서 작업한 아닉 메나르도 씨가 조향(造香)을, ‘장 폴 고티에’ ‘에르메스’ 브랜드를 거친 알랭 드무르그 씨가 용기 디자인을 맡았다.

○ 2대에 걸친 꿈-‘구리므’에서 향수로

올 7월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사장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한불(韓佛) 경제교류에 기여한 공로로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그는 이때 손 때 묻은 여권을 꺼내 보였다. 2003년 작고한 부친 서성환 회장이 사용하던 것이다.

“50년 전 아버지가 프랑스로 출장 다닐 때 사용했던 여권입니다. 오늘 이 훈장을 아버지께 바치고 싶습니다.”

롤리타, 그녀는 2대(代)에 걸친 꿈과 집념이 탄생시킨 브랜드다. 아모레퍼시픽은 1945년 태평양화학공업사라는 이름으로 창업한 뒤 미안수(로션), ‘구리므’(크림의 일본식 발음) 등을 생산했다. 이후 1959년 프랑스 코티사와 기술 제휴를 하는 등 국내 화장품 업계의 리딩 브랜드로 성장했다.

1988년 ‘순(SOON)’이라는 브랜드를 통해 스킨로션, 에센스 크림 등 기초 제품으로 프랑스 진출을 시도했다. 기술만은 믿을 만하다는 자부심으로 도전했지만 현지 반응은 냉담했다.

하지만 프랑스 진출은 화장품 브랜드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가야만 하는 길이었다. 몇 차례 도전이 실패한 뒤 기초 제품은 피부 타입이나 메이크업의 전통 등 다양한 요인 때문에 시장 진입이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 대신 집중적인 투자로 짧은 시간에 성과를 낼 수 있는 향수에 주목했다.

올봄 9년 만에 출시된 새 상품 ‘엘(L)’은 파리지앵을 매혹시킨 롤리타 렘피카의 ‘유전자’를 살렸다. 세이렌의 신화에서 모티브를 얻은 치명적인 유혹이 콘셉트다.

동국대 경영학과 여준상 교수는 “롤리타 렘피카는 브랜드의 현지화와 고급화 전략이 성공한 대표적 사례”라며 “아모레퍼시픽은 유럽에서는 롤리타 렘피카, 중화권에선 한류(韓流)를 앞세운 라네즈, 기타 지역에서는 모체 브랜드인 아모레퍼시픽으로 차별화하며 메가 브랜드를 키워 가고 있다”고 말했다.

롤리타 렘피카. 그녀의 욕망은 전 세계 어디서나 마주치는 낯선 이들에게서 자신의 향기를 맡는 것이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롤리타 렘피카’ 매니저 김효정 씨 “브랜드와 매니저는 부모-자식 관계”▼

“향수는 보이지 않는 ‘옷’이죠.”

‘롤리타 렘피카’의 브랜드 매니저 김효정(33·사진) 씨는 “자신을 표현하는 향수의 마지막 터치에 따라 사람의 분위기는 크게 달라진다”고 말한다.

김 씨는 거리에서 외모와 스타일이 어울리는 사람을 보면 어쩔 수 없이 힐끔힐끔 눈길을 준다. 스타일은 향기에 의해 완성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직업병이죠(웃음). 미에 대한 감각이 바뀌면서 패션에 어울리는 향기를 지닌 멋쟁이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꼭 유명 브랜드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취향에 맞는 향수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향수를 포함한 화장품 브랜드 매니저는 다른 분야와 비교할 때 특히 오감(五感)을 이용한 감각적 센스가 필요하다. 요즘 화장품이 색과 향, 촉각뿐 아니라 소리와 맛에 대한 감각까지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브랜드 매니저와 브랜드의 관계는 조금 과장하면 부모 자식 사이와 비슷해요. 고객의 마음을 읽는 단계에서부터 기획, 개발, 실험, 프로모션, 시장의 반응 등 모든 일을 함께 겪습니다. ‘마몽드’ ‘라네즈’ ‘롤리타 렘피카’처럼 번듯하게 성장하는 자식도 있지만 기대를 저버리는 자식도 있죠.”

그에게 향수는 알면 알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묘한 존재다. “향수는 스킨이나 로션처럼 피부를 실질적으로 개선시키는 기능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화장품의 ‘꽃’으로 대접받아요. 향수 한 방울로 섹시한 사람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수많은 스타가 이 향수의 추종자가 되는 것 같습니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