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진보경제학자 존 K 갤브레이스 98세로 영면

  • 입력 2006년 5월 1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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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9일 타계한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교수가 1998년 건강보험 개혁에 관해 강연하는 모습. AP 자료 사진
4월 29일 타계한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교수가 1998년 건강보험 개혁에 관해 강연하는 모습. AP 자료 사진
‘주류 경제학’의 우상을 파괴한 학자로 유명한 미국의 원로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하버드대 명예교수가 4월 29일 노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98세.

외신들은 갤브레이스 명예교수가 2주 전 입원한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한 병원에서 지난달 29일 숨졌다고 전했다.

1908년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스코틀랜드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26년 온타리오 농업대에 들어간 뒤 토론토대로 옮겨 학사과정을 마쳤다. 1933년에 미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서 석사를, 1934년에는 농업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29년에 일어난 대공황은 그를 농업경제학자에서 정부 개입주의자로 바꾼 계기가 됐다. 1937년 그는 대공황 대처법을 제시한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수요 이론’을 배우기 위해 시카고대에 특별연구원으로 들어갔다.

케인스 못지않게 그의 사상에 영향을 미친 사람은 ‘유한계급론’의 경제학자 토스타인 베블런이었다. 그는 베블런을 ‘미국 역사상 가장 통찰력 있는 사회과학자’라고 칭송했다. 1958년 그는 미 경제가 학교, 고속도로 등 공공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고 개인의 부만 만들어낸다고 비판했다. ‘개인’보다는 ‘공공’의 중요성을 일관되게 역설했다.

이러한 주장은 1973년 강력한 누진세와 주택, 의료기관의 공공 소유를 요구한 ‘신사회주의’로 이어졌다. 1992년에는 “진보주의자들이 보수주의자 흉내를 낸다면 희망도, 역할도 없다”고 주장했다.

갤브레이스 명예교수는 정치 막후에서 활동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직접 정치 무대에 나서기도 했다. 올다이 스티븐슨 일리노이 주지사와의 친분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이후 빌 클린턴 대통령에까지 이어져 민주당 정권의 경제 자문역으로 활동하며 미 행정부의 경제 운용에도 참여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0년 그를 인도 주재 미국대사로 임명했다. 대사직은 국무부와의 알력으로 27개월 만에 끝났지만 이는 평생에 걸친 ‘인도 사랑’의 출발점이 됐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뒤 군에 입대하려 했으나 203cm의 큰 키 때문에 거부당한 일도 있다.

1934∼39년 하버드대, 1939∼42년 프린스턴대 교수를 지냈고 1948년 다시 하버드대로 돌아와 1975년 은퇴 때까지 가르쳤다. 1946년과 2000년에 미 대통령으로부터 ‘자유의 메달’을 받았다.

이 진 기자 leej@donga.com

▼‘부유한 사회’ 등 저서 20세기의 명저로 남아▼

한 유머작가는 “갤브레이스 명예교수는 1959년 이후 저서 12권, 논문 135편, 서평 61편, 서문 16편, 촌평 312편, 뉴욕타임스 기고문 10만5876개를 쓰거나 보냈다”고 소개했다. 실제 수와는 다르지만 그의 ‘다작(多作)’을 빗댄 우스갯소리였다. 실제 저서는 33권.

그의 다작 습관은 1943∼48년 일했던 ‘포천’ 편집위원 시절 몸에 익었다. 1949년 이후 아침 일찍 일어나 2∼3시간씩 글을 쓴 뒤 일과를 시작하는 ‘아침형 인간’이었다.

대표적 저서로 ‘부유한 사회’(1958년), ‘불확실성의 시대’(1977년), ‘만족의 문화’(1992년) 등이 꼽힌다. ‘부유한 사회’는 1999년 미국 도서평가위원회가 금세기 최고의 영어 논픽션 100권 중 46위로 선정했다.

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존 F 케네디, 린든 존슨 대통령의 연설문을 작성할 정도로 글 솜씨가 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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