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어들이 온다” 방패주총…기업들 M&A공포 확산

  • 입력 2006년 3월 7일 0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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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상공회의소는 지난해 3월 ‘주주 행동주의의 국내외 비교와 정책 시사점’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외국계 투기자본의 국내기업 적대적 인수합병(M&A) 시도를 ‘약탈적 주주 행동주의의 표본’이라며 강하게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당시 대한상의 관계자는 이렇게 경고했다.

“외국계 투기자본은 난폭한 야생 호랑이다. 야생 호랑이는 그것이 먹이이기만 하면 무조건 먹어 치운다. 두고 봐라. 아직까지 투기자본은 지배구조에 문제가 있거나 주주정책이 부실한 기업만을 노렸다. 하지만 앞으로는 정말 우리가 지키고 싶은 기업, 국내산업에 모범이 되는 기업들을 사냥하러 올 것이다.”

이 ‘예언’은 1년 만에 적중했다. 주식이 잘 분산돼 있고 오랫동안 높은 배당 및 투명한 경영으로 주주정책의 모범사례로 꼽혔던 KT&G가 투기자본의 표적이 된 것이다.

국내기업의 태도도 달라졌다. 시민단체와 정부의 눈치를 보던 기업들이 앞 다퉈 M&A 방어 장치를 도입하고 있다. “앉아서 잡아먹힐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구택 포스코 회장 “위기감에 밤잠 제대로 못자”

최근 한국 기업들에 경영권 방어는 그야말로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이 6일 “세계적 철강업체 포스코가 해외 펀드의 다음 표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하면서 이제 어느 기업이라도 투기 펀드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

이구택 포스코 회장은 최근 “지배구조 우량기업인 KT&G 사태를 보면서 언제 적대적 M&A가 될지 몰라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며 위기감을 털어놓았다.

정부도 최근 포스코가 외국자본에 의해 공격당할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해 조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관계자는 “포스코의 지분구조 등에 대해 실무 차원의 조사를 했다”고 말했다. 정부도 국가 기간산업을 담당하는 포스코의 M&A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다.

기업들도 자구책 마련에 나섰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두산인프라코어 한미반도체 스타코넷 등은 ‘집중투표제 배제’를 올해 주주총회 정식 안건으로 잡았다. 집중투표제는 소액주주들의 투표권을 한곳에 몰 수 있도록 한 제도다.

태창기업 서울식품공업 메디포스트 등은 ‘황금낙하산’ 제도, 삼환기업 한국공항 서울일렉트론 등은 ‘초다수의결제’를 도입했거나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법이 허용하는 한도에서 최대한 M&A 방어 수단을 갖추겠다는 움직임들이다.

국제적 기업사냥꾼 칼 아이칸 씨의 표적이 된 KT&G의 곽영균 사장은 7일 오후 기자간담회를 열고 경영권 분쟁에 대한 회사의 입장과 대응방안을 밝힐 예정이다.

○점점 커지는 정부 역할에 대한 논란

적대적 M&A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면서 정부의 역할에 대한 논란도 커지고 있다. 지난주 재정경제부 박병원 차관은 기자간담회에서 “정부는 더는 M&A 방어 수단을 마련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하지만 기업들의 생각은 다르다. 전국경제인연합회 한 간부는 “중국이나 중동의 부호들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마음대로 미국 기업을 사지 못하는 것은 국가가 제도적으로 기업을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지금이야말로 우리 정부가 좋은 국내기업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정부는 “적대적 M&A에 대해서는 글로벌스탠더드(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에 따라야 한다”고만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국내 제도가 오히려 글로벌스탠더드에 맞지 않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현재 한국 기업이 갖고 있는 적대적 M&A 방어 수단은 초다수의결제와 황금낙하산 정도.

반면 선진국에는 경영권을 빼앗으려는 쪽의 지분을 떨어뜨리기 위해 새로운 주식을 발행할 수 있는 ‘포이즌 필’ 제도, 공공성이 강한 기업의 M&A를 정부가 거부할 수 있는 황금주 제도 등 다양한 방어 수단이 있다.

전경련 노성태 한국경제연구원장은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외국자본 유치에만 신경을 쓰다보니 국내 제도가 경영권을 방어하는 쪽에게 크게 불리하다”며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완배 기자 roryrery@donga.com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주성원 기자 s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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