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 ‘폭탄세일‘ 현장

  • 입력 2004년 3월 22일 16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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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오전 10시20분 서울 성북구 길음동 현대백화점 미아점 앞. 주부 100여명이 정문 앞 광장을 빼곡히 메운 채 문이 열리기만 기다리고 있다. 10분 뒤 안내방송과 함께 문이 열리자 100m 달리기 경주를 하듯 주부들은 필사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지하 1층에 마련된 여성 구두 진열대 앞. '리사'의 구두 50여 켤레가 동이 나기까지 걸린 시간은 50여초였다. 여러 켤레의 구두를 손에 쥔 주부는 의기양양해했고, 손이 빈 사람은 허탈한 표정이었다. 이 구두들은 20만원 안팎에 팔렸다가 반품된 제품으로 행사기간 중 값은 2만원.

주부 박희순씨(58·서울 노원구 월계2동)는 "지난주 화요일 행사가 시작될 때부터 매일 아침 와서 오늘 10켤레째 샀다"며 "그래봤자 20만원이니 구두 한 켤레 값"이라고 말했다.

요즘 유통업계에서는 이처럼 갖가지 '폭탄 세일' 아이디어를 내놓고 있다. 일년에 200일 남짓 동안 세일해도 유통경기가 살아날 기미가 안 보이기 때문이다.

백화점 바깥에 매장을 여는 '공간 이동형'도 있고 고급백화점과 어울리지 않게 반품상품이나 전시상품을 싸게 내놓거나 고가 상품을 경매로 파는 '이미지 파괴형'도 있다.

▽싸면 무조건 산다?=폭탄세일 현장에서 만난 소비자들 중 많은 사람들은 '품질'과 '가격'에 만족했다. 그러나 '싼 값'에 혹해서 당장은 필요 없는 상품을 여러 개 사는 식으로 '비합리적' 소비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롯데백화점에서 19일 오후 1시부터 진행된 '100원 경매전'에서는 563만원짜리 대우 일렉트로닉스의 42인치 PDP TV가 470만원에 낙찰된 게 대표적 사례. 이 경매에 참가했던 윤태진씨(45·자영업)는 "380만원까지 부르다가 중간에 포기했는데 전자랜드에서 같은 제품을 385만원에 파는 것을 보고 왔기 때문"이라며 "시장 조사를 충분히 하지 않고 온 사람들 때문에 값이 높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경매로 나온 필립스의 29인치 완전평면 TV, JVC의 32인치 TV, 바흐네트의 6.2㎏짜리 냉장고 등은 모두 백화점 판매가의 70~80% 선에서 낙찰됐다. 백화점에서는 당초 50%면 적정 가격대라고 봤었다.

19~21일 오전 8시30분부터 10시10분까지 애경백화점 구로점 동문 밖에서 열렸던 '알뜰 장터' 이용객 가운데 40%는 행사장에서 7000원짜리 청바지 등을 산 뒤 백화점 영업이 시작된 10시30분 이후 다시 백화점으로 들어갔다.

자영업자 윤영서씨(47·서울 양천구 목동)는 "출근을 미루고 아내와 함께 와서 아이들 옷과 내 셔츠를 샀다"며 "백화점 문이 열리면 더 둘러보고 가겠다"고 말했다. 애경측은 오전 매출이 지난해 같은 주말에 비해 50% 신장했다고 밝혔다.

▽백화점들의 고민='폭탄 세일'은 사실 백화점들로서는 큰 부담이 없는 행사다. 세일에 참가하는 업체들이 마진손실의 상당부분을 감수하기 때문. 실제로 한 백화점의 마케팅 팀장은 "어떻게 할인행사를 하더라도 입점업체에서는 백화점 마진을 보장해준다"며 "평소 마진율이 9%라면 소비자에게 10% 할인할 때마다 백화점 마진은 1%밖에 낮아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마진 손실이 적다고 해서 폭탄세일을 매번 할 수 없는 게 백화점이다. 할인점과 달리 가격이 아니라 서비스로 승부해야하기 때문. 자칫 '싸구려'라는 이미지가 고착화될 수도 있다. 게다가 소비자들이 세일에 너무 익숙해지면 경기가 살아나더라도 가격저항을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한 대형 백화점은 연간 폭탄세일 행사 횟수를 제한하려는 논의도 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기술산업실 김진혁 연구원은 "요즘은 '세일 기간이 아닌데 백화점에서 물건을 사면 바보'라고들 한다"며 "이런 분위기가 지속된다면 경기가 회복되더라도 백화점들은 고가전략으로 돌아가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하임숙기자 arteme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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