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위축 무엇이 문제인가

  • 입력 2003년 4월 16일 17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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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소비가 빠르게 위축되면서 시민과 중소기업, 유통업체들이 느끼는 체감경기는 한겨울에 가깝다. 거품 소비에 따른 후유증 탓이기도 하지만 지나친 소비심리 위축도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적정한 민간소비가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안정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미 성장률의 절반은 민간소비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소비현상을 집중 분석한다.》

“작년에 월평균 매출액이 4000만원 정도였는데 올 들어선 3000만원으로 25% 이상 줄었습니다. 일부 업체들은 백화점에서 아예 철수했어요. 지금 분위기로 봐선 연말까지 경기회복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롯데, 현대백화점 등 전국 주요백화점에 17개 매장을 갖고 있는 애사실업의 심길용 영업부장의 하소연이다. 핸드백 등 피혁제품을 판매하는 애사실업의 주 고객은 20대와 30대. 카드사들이 신용카드 이용한도를 줄이자 눈에 띄게 고객도 줄고 있다.

▽민간소비가 급속히 줄고 있다=롯데백화점 본점 이선대 과장은 “두 자릿수의 증가율을 보이던 매출이 작년 말에 한 자릿수로 떨어지더니 올 들어서는 마이너스 증가율”이라며 “봄맞이 세일을 작년에 비해 이틀 늘려 13일 동안이나 실시했는데 매출은 오히려 3% 정도 줄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3월 중 전국 백화점 매출액은 작년 같은 기간 대비 7.1% 감소했다.

서민들이 주로 찾는 할인매장에서도 고가품 매출이 크게 줄고 있다.

할인점인 이마트는 화장지 라면 등 생필품 매출은 늘었지만 가전제품과 의류 등의 매출은 감소했다고 밝혔다. 소비자들은 비싼 한우 쇠고기 대신에 수입 쇠고기를 찾고 있다.

이마트 김대식 과장은 “고객들이 구매력이 있어도 이라크전쟁, 금융시장 불안 등 경제 불확실성 때문에 구매를 자제하고 있는 것 같다”며 소비심리 위축을 우려했다.

자동차 가전제품 등의 재고도 쌓이고 있다. 자동차는 판매가 급속히 위축되면서 작년 연말 1만5000대 수준이던 재고가 6만6000대 수준으로 늘었다. 현대자동차는 올해 초 매출이 뚝 떨어지면서 1만8000대에 불과했던 재고 수준이 최근 3만5000대 규모로 늘었다.

이 같은 소비 현장의 찬바람은 통계가 증명하고 있다.

2001년과 2002년 높은 증가율을 보였던 도소매 판매와 내수용 소비재 출하지수는 올 들어 급락하고 있다.

도매 판매액지수는 2000년 전년 대비 9.1% 증가한 뒤 2001년 4.8%, 2002년 4.1%로 증가세를 나타냈다. 하지만 월별로는 작년 11월 3.8%, 12월 1.1%, 올해 1월 1.0%, 2월 ―0.2%로 빠르게 나빠지고 있다.

소매 판매액지수도 연도별, 월별로 도매판매액 지수와 비슷한 추이다. 소매 판매액지수는 작년 12월 ―2.4%, 올해 1월 8.4%, 2월 ―7.4%로 나타났다. 내수용 소비재 출하지수도 2월 ―2.3%로 나타났다.

▽외제품 소비는 여전히 호황이다=내수용 소비재 수입액은 작년 11월 23.5%, 12월 24.3%, 올 1월 14.8%, 2월 20.3%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경기불황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는 고소득층이 소비를 계속 늘리고 있다는 의미다. 소비 양극화가 나타나고 있는 것.

이에 따라 상품소비 중 외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98년 9.0%에서 2000년 15.8%, 2001년 17.9%, 2002년 22.1%로 높아졌다.

외제품 소비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사치성 외제품 소비의 급증은 문제가 많다는 지적이다. 농수산물과 의류 등 생활필수품 수입은 물가안정 등 긍정적 측면이 있지만 사치성 외제품 소비는 국내 경제에 기여하는 바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는 빈부격차가 큰 중남미국가에서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한국은행 정영택 차장은 “골프채와 양주, 자동차 등 고가 외제품 수입이 급증하고 있다”며 “이 같은 소비는 성장과 고용에 별로 기여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민간소비는 성장의 절반을 담당한다=민간소비가 성장에 기여한 비율은 99년 51.8%였다. 2000년에 43.6%, 2001년에 77.1%, 2002년 54.9%에 달했다.

올해는 민간소비 위축과 함께 설비투자가 좀처럼 되살아나지 않는 데다 경상수지마저 적자일 전망이다. 이러다 보니 한은은 올해 성장률을 4%대로 내다봤다. 이마저 하반기에 소비와 투자, 수출이 어느 정도 회복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민간소비 위축이 장기화하면 소비위축→판매부진→생산위축→소득감소→소비위축의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

민간소비 침체는 특히 유통, 식음료 등 노동 집약적 산업의 위축을 가져오면서 실업난으로 이어진다.

한국은행 안용성 국민소득통계팀장은 “미래를 위해 설비투자와 경상수지 흑자가 성장을 주도하는 것이 바람직스럽지만 한국경제 규모를 감안할 때 성장의 절반은 민간소비가 맡아줘야 한다”고 말했다.

임규진기자 mhjh22@donga.com

신치영기자 higgledy@donga.com

▼소비가 미덕이다 ▼

한국은 1970, 80년대만 해도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수출에 주력했다.

수출을 통해 달러를 벌어들이고 이 돈으로 원유 등 산업원자재를 구입해 생산현장에 투입했다. 이런 구조로 두 자릿수의 고도성장을 구가했다.

그런데 외환위기 이후 경제가 회복되면서 ‘수출도 중요하지만 국내 소비도 경제성장의 중요한 한 축’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는 민간소비가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알 수 있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98년 54.6%에서 2002년 60.2%로 늘었다.

한국의 지난해 경제성장률은 아시아지역에서 가장 높은 6.3%였는데 국내 소비증가율은 이보다 높은 6.8%로 집계됐다. 고성장의 일등공신이 소비인 셈.

또 2001년에는 경제성장률이 3.0%에 불과했으나 민간소비는 4.2% 증가해 급격한 경기하락을 막아주는 완충작용을 했다.

따라서 수출도 중요하지만 적절한 국내 소비도 경제성장의 중요한 축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같이 소비의 비중이 커진 것은 외환위기 이후 정부의 경기회복 정책과 맞물려 있다. 정부는 수출이 살아나지 않자 다급한 마음에 손쉬운 건설경기 부양에 손을 댄 데 이어 신용카드 사용을 확산시키면서 소비를 촉진시켰다.

여기에 은행을 비롯한 금융회사들이 안전한 가계대출에 주력하고 신용카드사의 무분별한 확장영업이 겹쳤다.

삼성경제연구소 이은미 연구원은 “세계 시장의 경쟁심화와 제조업의 세계적인 공급과잉, 기술혁신의 신속한 전파 등으로 과거의 수출주도형 성장전략은 한계에 부닥쳤다”며 “서비스산업 등 내수와 수출을 균형적으로 성장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서비스산업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0년 52.9%로 미국(74.4%)은 물론 제조업 중심국인 일본(66.8%)에 비해서도 낮다.

한편 한국은행 경제예측팀 김대수 차장은 “현재의 소비위축은 소득감소 요인보다는 북한 핵 사태와 이라크전쟁, 카드채를 비롯한 금융시장 불안 등 심리적 요인의 영향이 더 크다”며 “대외 변수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풀려가고 있어 중산층의 소비가 다소 살아날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김두영기자 nirvana1@donga.com

▼정부의 시각 ▼

정부는 소비위축 현상에 대해 인위적으로 소비를 부추기지는 않을 방침이다.

최근 소비위축이 우려할 만한 수준이라는 각종 통계들은 이라크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측정돼 이를 보고 정책기조를 바꾸는 것은 무리라는 시각이다.

재정경제부 박병원(朴炳元) 경제정책국장은 “소비심리가 잠시 위축됐다고 해서 정부가 소비를 부추기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국장은 “이달 들어 발표된 몇몇 통계를 보면 민간소비나 투자심리가 매우 나빠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조사시점이 이라크전쟁 발발 이전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며 “이라크전쟁이 마무리된 데다 북핵 문제도 개선될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경제 환경이 빠르게 안정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최근의 소비 및 투자 위축이 한국 경제에 위태로울 정도로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라는 얘기다.

한국은행 강균오 동향분석팀장도 “외환위기 이후에도 민간소비부터 가라앉는 모습이 보였지만 지금은 당시 상황과는 다르다”면서 “환율도 최근 강세를 보이고 있는 데다 3월에 비해 4월의 민간소비가 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각 연구기관은 가족의 날 행사가 많은 5월에는 소비가 안정궤도를 보일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금융감독기관은 가계대출의 적절한 증가를 통해 건전한 소비가 이루어지도록 정책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정재(李晶載) 금융감독위원장은 “가계대출 증가는 내수를 진작시켜 경기회복에 기여하지만 경기 침체시 가계 상환능력을 떨어뜨려 금융회사의 건전성을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양면이 있어 적절한 관리가 중요하다”고 최근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강조했다.김석동(金錫東) 금감위 감독정책1국장은 “지난 5년간 가계대출은 연평균 16.1% 늘었고 특히 작년엔 30.3%나 증가해 우려할 만한 수준에까지 이르렀다”며 “올해는 가계대출 증가세를 15% 안팎으로 묶어 가계대출이 경제성장의 동력으로 작용하도록 할 작정”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이처럼 소비를 인위적으로 부추기는 대신 재정의 조기집행과 설비투자 확대에 우선 순위를 둔다는 방침이다.

김동원기자 davi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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