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이찬근/재벌의 順기능 살려야

  • 입력 2003년 1월 30일 17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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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선 재벌을 비판하지 않는 학자는 관변·어용 내지는 지적 방관자로 통한다. 재벌이 개발독재의 부정적인 유산이자, 환란의 주범으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외의 학계에서는, 특히 경제발전론을 공부하는 연구자들은 재벌에 대한 평가가 우호적이다. 재벌의 역할을 빼놓고는 한국의 유례 없는 경제발전을 설명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으레 그렇듯이 새 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재벌개혁이 다시 초미의 관심거리가 되어 있다. 그 핵심은 전근대적인 소유-지배구조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경제 정의의 관점에서 본다면 최근 거론되고 있는 각종 재벌개혁안의 취지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정의를 위한 개혁이 성장잠재력을 계속적으로 키우고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는 현안의 해결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는 것이다.

▼‘뭘 먹고 살것인가’▼

국내외의 연구 결과를 일별해보면 소유-지배구조의 형태가 기업과 국민경제의 성과를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라고 단정짓기가 매우 어렵다. 오히려 양자간에는 별 관계가 없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주지하듯이 광범위한 소유 분산과 독립전문경영을 표방해온 영미의 기업이 과연 최강의 글로벌 경쟁력을 지켜냈는가는 의문이고, 다른 한편 유럽 각국에선 여전히 국가소유 및 가족소유의 대기업이 꾸준히 경쟁력을 발휘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초창기 수년간 누적적자를 짊어져야 했던 자동차 반도체 산업의 비약적인 발전, 그리고 포스코 성장신화의 배후에는 소유지배권을 장악한 재벌과 국가가 있었다.

따라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기업의 외양이 현대적이냐 아니냐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요구하는 핵심역량을 갖추었느냐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의 재벌은 조직력 마케팅력 기술력에서 국내 최강의 인재집단이자 문제해결 집단임을 부정할 수 없다. 더욱이 국가경쟁력 차원에서 물적 조직적 인적 자원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를 단기적인 이윤논리가 횡행하는 자본시장에 무작정 맡길 수 없다면, 오히려 안정적인 대주주의 순기능을 인정함으로써 지배권의 혼란을 막고 경영의 장기적 시야를 확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뭘 먹고 살 것인가’라는 최근의 산업전략적인 화두와 관련해 보아도 재벌의 필요악적인 특성이 더욱 뚜렷해진다. 일각에서는 중국의 부상에 따라 제조업 경쟁력이 한계에 다다랐으므로 국제서비스업을 새로운 산업의 축으로 하여 산업구조를 대전환해야 한다는 구상을 내놓고 있다. 동북아 물류센터론, 금융허브론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전문성을 가진 외국자본의 유치, 신세대형 중소업체의 육성을 통해 재벌집중이라는 고질적인 병폐도 더불어 치유될 수 있다고 낙관한다.

물론 역동적인 동북아 경제권에서 미래를 선점해야 한다는 발상 자체에 대해서는 찬동한다. 그러나 이를 추진할 수 있는 기초 역량이 과연 빠른 시간 내에 축적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이다. 무엇보다도 어학실력과 기획능력을 요체로 하는 개인경쟁력의 저변 확대가 없이는 국제서비스업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신산업의 싹을 키워가는 고단한 과정에서 국민경제의 성장과 고용을 책임질 수 있는 안정 섹터의 지목이 중요하다.

▼국민기업으로 키우는 지혜를▼

가장 현실적인 선택은 재벌기업군을 지렛대로 전통 제조업을 세계 최강으로 키우 는데 주력하면서 정보기술(IT) 등 유망 첨단기술산업과 적극적으로 접목해가는 경로의존형 산업전략이 아니겠는가. 바로 이 때문에 그간 경제정의적 관점에 머물러온 재벌개혁론은 산업전략적 관점과 결합됨으로써 크게 수정되어야 한다. 성장엔진으로서의 재벌의 역할을 과감하게 인정하되 국가와 사회의 감시 감독 네트워크를 강화함으로써 이들을 국적자본의 국민기업으로 키워내겠다는 사고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단 소유-지배구조의 투명화를 위해서는 재벌 산하의 금융계열사와 비금융 계열사를 구분해서 별개의 지주회사 체제로 개편하고 비금융 지주회사에 대해서만 지배권을 인정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

이찬근 인천대 교수·객원논설위원 ckl1022@inche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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