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영이/정직을 버린 기업의 종말

  • 입력 2002년 1월 24일 18시 37분


2000년 7월 1일 일본의 최대 우유업체인 유키지루시(雪印)유업 사장이 기자회견을 열어 눈물을 글썽이며 용서를 빌었다. 위생관리가 제대로 안된 이 회사 우유를 먹은 학생 등 1만3000명이 집단 식중독을 일으키고 1명이 숨진 지 3개월 만이었다.

당시 일본 사회의 충격은 대단했다. 먹는 것에 대한 안전 신화가 깨졌고, 정직과 장인정신을 우선시해온 일본 기업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 유키지루시는 이 사건으로 지난해 상반기 매출이 전년보다 1000억엔 이상 급락했고 4000억엔이 넘는 적자를 봤다.

이후 유키지루시는 스스로 우유 제조 공정상의 문제점을 낱낱이 털어놓으며 소비자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주력했다. 매출이 살아나기 시작해 하반기엔 거의 식중독사건 때 정도로 회복했다. 이로 인해 유키지루시 사건은 대표적인 기업의 실패극복 사례로 연구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로부터 1년반 만인 23일. 자회사인 유키지루시식품의 사장이 다시 기자회견을 갖고 머리를 조아렸다.

일본 정부가 광우병 피해를 본 축산업자를 지원하기 위해 국산 쇠고기를 매입해 소각하는 것을 악용해 수입쇠고기 12t을 국산이라고 속여 지원금을 신청했던 것.

이번 사건은 일본 국민들의 더욱 큰 분노를 샀다. 식중독 사건이 단순히 사고를 덮으려다 일어난 것이었다면 이번 사건은 기업의 도덕성을 근본적으로 의심케 하는 범죄였기 때문이었다.

유키지루시식품 사장은 광우병 파동 등으로 매출이 30% 이상 줄고 수입쇠고기 재고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실적 부진을 고민한 끝에 이번 사건을 저질렀다고 털어놓았다.

전국 유통업체들은 판매대에서 유키지루시 상품을 거둬들이고 있다. 유키지루시는 이번 사건으로 다시는 재기할 수 없을 만큼 치명타를 입었다. 불황이라고 정직과 양심을 파는 것은 기업을 파는 것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아도 소용이 없게 됐다.

이영이 도쿄특파원 yes20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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