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정부 국정진단-4]官治청산 말뿐… 기업-시장 비틀

  • 입력 2001년 8월 29일 18시 42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동전의 양면이고 수레의 양바퀴 같습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조화를 이루면서 함께 발전하면 정경유착이나 관치금융, 그리고 부정부패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취임사(1998년 2월25일)에서 ‘시장경제 창달’을 경제분야 정책기조의 핵심으로 내세웠다. 같은 해 광복절 경축사에서는 “관치(官治)로부터 경제를 해방시켜 시장경제의 자율성을 높이는 구조개혁에 전력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에 앞서 김 대통령은 당선 직후(1997년 12월19일) 가진 기자회견에서 “모든 기업을 권력의 사슬이나 비호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킬 것”이라며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내보였다. 》

그러나 현 정부 출범 3년반이 지난 지금, 취임 초의 이런 약속에 대한 국민의 평가는 부정적이다. 동아일보가 24일 리서치 앤 리서치(R&R)에 의뢰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조화로운 발전’에 대해 36%만이 ‘잘 추진해오고 있다’고 평가한 반면 58.5%는 ‘잘 추진해오고 있지 못하다’고 답했다. 또 ‘기업활동에 대한 정부개입 최소화로 시장경제 자율성 확대’ 약속에 대해서도 부정적 평가(58.5%)가 긍정적 답변(35.0%)을 압도했다. 무엇 때문일까.

▼관치경제와 흔들리는 원칙▼

DJ 정부가 시행해온 경제정책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정부가 지나치게 시장에 개입하는 ‘관치경제’와 공평하고 엄정한 시장원리보다 대상과 상황에 따라 원칙이 흔들리는 ‘편의주의적 정책운용’이 그것이다.

▼싣는 순서▼

- ①남북관계
- ②국민화합
- ③相生정치
- ④시장경제
- ⑤사회개혁
- ⑥언론자유

물론 이런 비판에 대해 정부로서는 억울할 수도 있다. 현 정부는 정상적인 경제시스템이 사실상 마비된 외환위기라는 국난(國難) 속에 출범했다. 경제 패러다임의 변화와 국제통화기금(IMF) 프로그램에 따른 구조조정 과정에서 경제의 거의 모든 분야에 정부가 개입할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성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상황논리’를 수긍하더라도 경제정책의 ‘파행’이 도를 넘어선 데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김석중(金奭中) 상무는 “현 정부 경제정책은 시장경제원리에 따라 이뤄지지 않았고 기업환경도 좋아지지 않았다”며 지난 3년반의 정책을 임기응변적 대응에 의존한 ‘두더지 게임’으로 표현했다.

▼관련기사▼

- 전문가 진단 "규제 풀어야"
- 실패한 빅딜 현주소

관치경제의 산물로 큰 후유증을 낳고 있는 대표적인 ‘정책실패’가 사실상 정부 입김으로 강행된 빅딜(대규모 사업교환). 정부 고위당국자들조차 사석에서 “빅딜문제는 현대그룹 특혜의혹과 함께 나중에 국정조사나 청문회로 이어질 핵심사안”이라고 말한다.

기준도, 원칙도 흔들린 부실기업 처리문제도 논란을 빚는 대목. 대표적 사례가 현대다. 막대한 돈을 쏟아부으며 민간차원에서 ‘햇볕정책’을 지원한 현대는 현 정부 출범 초기 기업인수에 잇따라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다가 갖가지 운영상의 난조로 대형부실의 수렁에 빠지자 정부는 여타 기업에 대한 퇴출원칙 논리와는 달리 현대 계열사들에 대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의 지원을 계속해 정경유착의 의혹까지 사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가 98년 신세기투신과 한남투신의 고객 신탁자산을 한국투신과 현대투신에 떠맡긴 뒤 실적배당상품의 특성을 무시하고 공적자금을 투입하면서까지 원리금을 보장한 것과 99년말 투신사들에 대우 회사채 매입을 강요한 것, 지난해 ‘4·13’ 총선을 앞두고 사실상 구조조정을 중단하고 선심성 경제정책을 남발한 것도 시장경제논리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기업하기 힘든 나라▼

한국을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만들겠다던 김 대통령의 초심(初心)은 어찌 되었는가. 당사자인 기업은 물론 국내외 전문가나 연구기관의 평가도 매우 낮은 게 오늘의 현실이다.

한국이 ‘기업하기 힘든 나라’라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는 많다(표 참조). 미국 헤리티지 재단 등이 발표한 한국의 경제자유도 순위는 우간다 및 헝가리와 비슷한 43위였다. 국내기업들이 잇따라 공장을 해외로 옮기는 ‘기업이민’이 이 같은 상황을 웅변으로 말해준다.

‘시장경제의 꽃’인 기업을 힘들게 하는 핵심요인은 기업규제와 노사문제. 특히 기업규제의 경우 정부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해법마련이 어렵지 않은데도 지지부진하다. “제발 기업인들이 미친 듯이 일만 할 수 있게 해달라”(손길승·孫吉丞 SK회장)는 게 기업인들의 호소다.

삼성경제연구소 정문건(丁文建) 전무는 한국을 ‘세계 각국 규제의 종합전시장’이라고 말한다. 개발경제시대에 만든 일반규제가 여전히 남아 있고 △경제력 집중을 억제하기 위해 도입된 대기업 규제(30대 그룹 지정제도, 출자총액 제한제도)에 △외환위기 후 새로 만든 규제(일률적인 부채비율 200% 제한, 해외현지법인의 현지금융 차입규제 등)까지 가중됐다. 30대그룹 지정 및 출자총액 제한제도가 있는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

규제를 풀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여야와 정부가 원칙적으로 규제완화에 합의했지만 제대로 진척되지 않는다. 재정경제부는 추가 규제완화에 적극적이지만 공정거래위원회가 대기업들을 ‘환란의 주범’으로 몰아붙이며 버티고 있다. 여기에 여당 내 일각에서도 “개혁명분을 훼손한다”며 소극적이어서 문제를 더 꼬이게 한다.

▼해법은 경제논리 준수와 규제완화▼

김 대통령이 초심에 부합하는 정책을 펴나가는 것만이 남은 임기 중에 오늘의 경제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처방전’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특히 경제주체들이 분명히 알 수 있는 가이드라인에 입각해 부실기업을 처리하고 투자심리를 가로막는 규제는 꼭 남겨야할 부분만 빼고는 대폭 풀어나가야 한다는 것.

좌승희(左承喜) 한국경제연구원장은 “이미 ‘정부가 하느님인 세상’에서 ‘시장이 하느님인 세상’으로 바뀌었다”며 규모와 특성, 능력이 다른 경제주체를 똑같이 만들려는 ‘관치 평등화’에서 벗어나 시장에 평가를 맡기는 ‘시장 차별화’ 정책을 촉구했다.

양수길(楊秀吉) 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사는 “정부는 경제발전 토대만 조성하고 기업이 자율적으로 경영하고 변신할 수 있게 해야 한다”며 30대그룹 지정, 출자총액 제한, 획일적 부채비율 제한 등을 폐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순활·박원재·최영해기자>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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