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변해야한다]고위관료/대통령 앞이라도 "NO" 말하라

  • 입력 2001년 1월 2일 18시 52분


《지난해 11월15일 재정경제부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브루나이를 방문중인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코스닥투자자에 대한 세금혜택 부여 방침’을 밝혔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진념(陳稔)장관 등 재경부 당국자들은 직접적인 증시부양에 대해 줄곧 반대했다. 당연히 실무검토도 이뤄지지 않았다. 몇몇 공무원은 “청와대 참모중 누군가가 ‘한건주의’ 발상에서 장난을 친 것 같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마침내 한달 뒤 재경부는 근로자주식저축제도 부활 등의 대책을 내놓았다.》

경제정책 등이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을 감안하면 장차관을 비롯한 고위관료에게 가장 요구되는 덕목은 ‘최소한의 정책 일관성’이다. 물론 정책을 바꾸거나 보완해야 할 때도 있다.

예금부분보장제나 2단계 외환자유화를 둘러싼 정책조정은 원칙을 지키면서 적절히 현실을 절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부처내, 또는 부처간 조율미흡이나 이해관계 충돌로 혼선을 빚거나 원칙이 무너진 정책이 너무 많다. 부처 바깥의 정치논리에 의해 효율성이 결여된 정책이 나오는 사례도 흔하다.

 신년특집 2001 변해야 한다
- 변해야 할 한국사회 7대집단 1위 정치인
- 고위관료/대통령 앞이라도 "NO" 말하라
- 재벌총수/'황제경영'으론 세계1등 못해
- 검찰/'시녀服' 벗고 법복을 입어라
- 대통령/'나홀로' 버리고 막힌 귀 열때
- 언론/'정치권 입김' 단호히 배격을

건설교통부가 관계부처 협의도 거치지 않고 불쑥 발표해 아직도 혼선을 빚고 있는 판교 신도시 건설, 재경부가 감자(減資)은행 소액주주에게 신주인수권이라는 ‘특혜’를 주기로 한 결정, 2차 공적자금 조성문제나 은행감자를 둘러싼 정부 고위인사들의 ‘말바꾸기’ 등은 대표적이다. 행정자치부의 반발로 한때 국무회의 상정이 보류됐던 재경부의 ‘돈세탁’ 방지관련 법안처럼 경제부처와 비경제부처간 이해가 얽히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한양대 예종석(芮鍾碩·경영학)교수는 “행정부처가 청와대나 집권당 입김에 너무 약하고 장관들이 대통령 눈치를 살피며 소신있게 일을 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서강대 최운열(崔運烈·경영학)교수는 “지금은 누가 장관이 되더라도 리더십을 발휘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4·13총선은 경제장관들이 정치논리에 동원된 대표적 사례로 자주 꼽힌다. 당시 경제장관들은 집권여당의 요구로 야당주장을 반박하는 신문광고까지 내는 등 경쟁적으로 국가채무 논쟁에 뛰어들었고 ‘IMF 졸업론’ 등을 퍼뜨렸다. 야당의 주장이 논리적으로 무리한 부분이 있긴 했지만 여야간 정쟁에서 행정부가 ‘여당의 시녀’로 비쳐짐으로써 효과적인 정책수립에 걸림돌이 됐다.

잦은 개각도 행정의 일관성을 가로막는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특히 과거 민주화투쟁을 이끌었던 김영삼(金泳三) 김대중(金大中)정부에서 ‘경제팀 수장’의 평균임기는 9개월도 채 못 된다. 전문성이 필요한 경제부처에서 취임후 반년은 ‘겨우 업무를 익히는 시기’다. 전문가들은 “한국사회에서 나타난 정치민주화와 경제정책 효율성간의 역함수가 자칫하면 우리 사회에 정치적 허무주의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걱정한다.

서울대 최도성(崔道成·경영학)교수는 “장관은 언제라도 물러날 각오로 다음 자리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며 “원칙에 어긋나는 지시는 대통령 앞이라도 ‘그것은 안됩니다’라고 직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행정의 자율성을 정치권이 인정해야 한다는 주문도 나온다. 포스코경영연구소 이영호(李永鎬)연구위원은 “당정협의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여당의 구미에 맞게 정치논리가 경제논리를 압도해 정책이 흔들린다”며 당정협의절차 개선을 촉구했다. 반면 서울대 송호근(宋虎根·사회학)교수는 “집권당내에 정책전문가 집단이 없어 관료에게만 의존하는 것이 더 큰 문제”라며 집권당 정책기능의 강화를 촉구했다.

경제정책의 일관성을 위해서는 주요 정책을 국무회의나 차관회의에 올리기 전에 경제부총리를 축으로 하는 경제장관회의에서 미리 충분히 조율해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전문가들은 또 “명백히 실패한 관료가 정권이 바뀌었다고 다시 득세하거나 정치적 이유로 최소한의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인사가 각료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권순활·구자룡·최영해기자>shkwon@donga.com

▼소신있는 장차관 갈수록 보기힘들어▼

상당수 공무원들은 “역설적이지만 정치민주화 이후 소신 있는 장차관이 줄어들었다”고 안타까워한다.

재정경제부 A과장의 말. “대표적 군사정권이었던 박정희 전두환 정부는 경제장관을 한번 기용하면 일정 기간 믿고 힘을 실어주었다. 노태우 정부 이후 사람을 너무 자주 바꾸고 걸핏하면 책임을 장관에게 뒤집어 씌웠다. 장관이 ‘파리목숨’이 되니 정책의 일관성이 있을 리 없었다.”

지난해 8월 개각 때 물러난 모 차관의 ‘설화(舌禍)’후 경제부처 관료들은 부쩍 말조심을 한다. 어느 국장은 “4·13총선을 앞두고 국가채무를 둘러싼 TV토론에서 야당주장을 반박하면서 ‘그런 지적도 일리는 있지만’이라고 ‘토’를 단 것이 고위층의 진노를 사 옷을 벗게 됐다”고 전한다.

‘윗사람에게는 약하고 아랫사람은 누르는’ 일부 관료가 출세하는 공직풍토에 대한 비판도 많다.

현정부에서 장관을 지내고 물러난 B씨는 ‘출세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상사’로 자주 꼽힌다. 그는 과장 때 부하들을 닦달해 다른 과의 ‘업무추진계획’을 빼온 뒤 그럴듯한 내용은 자신이 상사에게 보고해 점수를 땄다. 장관이 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충성파 부하’를 핵심보직에 앉히는 ‘물갈이’였다.

물론 고위관료를 싸잡아 매도하는 데는 거부감도 많다. 한 재경부 국장은 “문제 있는 고위공직자가 꽤 있었지만 업무나 리더십면에서 존경할 만한 상사도 적지 않았다”며 지나치게 편향된 시각을 경계했다.

<권순활기자>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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