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調査공포'…정부기관에 자료대느라 '비지땀'

  • 입력 2000년 10월 22일 18시 54분


A그룹 핵심계열사 재무팀의 K과장은 지난 한해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금융감독원 등 3개 정부 기관으로부터 64일간 조사를 받았다. 올해 조사횟수는 작년보다 많을 것으로 걱정된다.

일단 조사가 시작되면 일상업무는 뒷전으로 밀리게 마련. 재무 인사 기획 등 핵심부서 직원이 총동원돼 수발을 들어야 한다.

지난해 공식조사 기간은 두달 남짓이지만 자료작성 등 사전 준비와 뒤처리에 걸린 시간까지 합하면 실제 조사일수는 120여일에 이른다는 것. 그는 “1년중 3분의 1을 조사받는 데 허비하다 보니 자금조달이나 운용과 같은 고유업무에는 신경을 쓰지 못하는 실정”이라며 “아예 조사전담 부서를 별도로 두자고 건의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정부 부처마다 경쟁적으로 기업조사권 확대를 추진해 기업들의 투자심리를 더욱 위축시키고 있다.

▽기업 발목잡는 조사〓올해 기업들에 대한 조사는 상반기에 뜸하다가 하반기 이후 집중된 게 특징. 6월 국세청이 정기 법인세 조사와 별도로 삼성 현대 LG SK 등 4대그룹을 상대로 주식이동 특별세무조사를 진행중이다. 공정위는 8월부터 부당 내부거래조사에 착수했다. 금감원은 9월부터 재벌계열 금융기관에 대해 연계검사를 벌이고 있다.

재계가 가장 문제삼는 대목은 한 기관이 이미 조사한 내용을 엇비슷한 시기에 다른 기관이 또 조사하거나 기관마다 비슷한 자료를 요구한다는 점. A그룹 임원은 “기업 입장에서는 국세청이나 공정위나 모두 ‘정부’인데 재탕 삼탕식으로 반복 조사를 벌이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며 “기관간 자료협조나 정보공유만 이뤄져도 기업부담을 절반 이상 덜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K과장은 “조사지원에 투입되는 임직원은 기업의 핵심인력”이라며 “요즘같은 무한경쟁 시대에 지휘부를 무장해제시킨 꼴”이라고 개탄했다.

주식내부 거래와 관련, 국세청과 공정위의 동시 조사를 받고 있는 B그룹은 계열사가 대주주로부터 넘겨받은 주식의 매입가격에 대해 두 기관이 서로 다른 입장을 보여 혼란을 겪기도 했다. 건당 수백여쪽에 달하는 방대한 자료를 여러 기관에 동시에 제출하느라 복사하는 것은 전자정부 시대에 걸맞지 않은 낡은 관행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기업 경영에 치명타〓C그룹은 4대그룹 주식이동에 대한 국세청의 특별 세무조사가 임박한 5월경 출처불명의 음해성 루머로 곤욕을 치렀다. ‘세무조사의 진짜 타깃은 C그룹’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외국인 주주들의 사실확인 요청이 쇄도했고 주가가 급락했다.

재계는 기업이 부당내부거래 등을 통해 법을 어겼다면 철저한 조사와 따끔한 처벌이 있어야겠지만 같은 내용을 여러 기관이 경쟁적으로 뒤지는 식의 조사권 남발로 기업의욕을 꺾는 폐단은 시정돼야 한다는 입장.

전경련 신종익 규제조사본부장은 “조사착수 사실이 공표되면 시장에서는 ‘무언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단정해 기업의 신용도가 떨어지고 외자유치에도 타격을 받게 된다”며 “조사하기도 전에 기업명단과 혐의내용을 미리 밝히는 행태는 고쳐져야 한다”고 말했다.

<박원재기자>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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