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료 인하 證市빅뱅]앞으로 1년내 3,4개社만 살아남는다

  • 입력 2000년 3월 14일 19시 10분


97년 3월 증권업협회 4층 증권연구원장실.

최운열(崔運烈)증권연구원장은 한 증권사 사장으로부터 거센 항의전화를 받았다. “협회 회비로 운용하는 증권연구원이 어떻게 증권사가 망한다는 보고서를 내놓을 수 있느냐”는 불만이었다.

당시 증권연구원은 위탁수수료 카르텔이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예상하고 ‘만약 수수료를 절반만 떨어뜨리면 30여개 증권사 중 절반이 3년 내에 망할 것’이라는 충격적인 보고서를 내놨다. 증권사들이 발칵 뒤집힌 것은 당연한 일.

▽‘디프 체인지’냐, ‘서든데스’냐〓보고서 파동 후 정확히 3년 만에 수수료 전쟁이 시작됐다. 우영호(禹英虎)증권연구원부원장은 “하루 거래량이 재작년까지만 해도 4000만주에 그쳤지만 지금은 4억주를 넘을 때가 숱하다”며 “사이버매매와 액면분할 등을 고려해도 수수료를 지금보다 충분히 더 떨어뜨릴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고 말했다.

증권사들은 이제 싫든 좋든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철저히 변신하든지(deep change), 아니면 아예 증권업에서 손을 떼든지(sudden death) 생존방식을 골라야 할 때라는 것.

▽무한경쟁시대로…〓수수료 빅뱅은 미국과 영국이 일찌감치 겪은 일. 75년 5월1일 미국에서는 1792년 이후 180년 간 고수해온 고정수수료 제도가 무너졌다. 브로커 수입에 의존해온 미국 증권업계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때마침 증시가 장기침체를 겪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회사가 도산하거나 다른 회사에 합병됐다. 빅10 증권사 중 온전히 살아남은 곳은 메릴린치와 골드만삭스 정도.

당시 고심 끝에 발표한 수수료 인하의 약발이 60초밖에 먹히지 않았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바로 1분 뒤 다른 회사가 수수료를 더 내렸기 때문. 80년대에 수수료빅뱅을 경험한 영국에서는 19개 증권사의 주인이 모두 바뀌고 말았다. 적자생존의 ‘정글의 법칙’이 자본시장에서 그대로 재연된 것.

▽‘춘추전국시대’는 언제까지〓현재 증권업계는 대우 현대 LG 삼성 등 대형사들의 카르텔이 무너질 조짐을 보이자 e*미래에셋과 세종증권이 수수료 인하를 외치고 나오면서 5개 내외의 증권사가 생존을 건 싸움을 벌이는 춘추전국시대의 양상이다.

점포 수가 많은 대형증권사가 기득권을 잃고 있는 요인은 인터넷의 급격한 발달. 5대 증권사가 아직 전체 수수료 수입의 절반을 가져가고 있지만 이제는 디스카운트 브로커(할인중개업자) 인터넷증권사 등 특화된 증권사들까지 숟가락을 올려놓는다.

하지만 군웅이 할거하는 춘추전국시대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

▽서비스 차별화와 수수료 인하의 ‘싸움’〓원업투자자문의 손근상박사는 “앞으로 1년 안에 3, 4개 증권사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급격한 구조조정의 회오리에 휩싸일 것”이라고 단언한다.

끝까지 살아남을 회사는 서비스 차별화에 성공한 초대형증권사 1, 2군데와 e*미래에셋처럼 조직이 가벼워 의사결정이 신속한 회사. 세종증권처럼 사이버와 인수부문에서 경쟁력이 돋보이는 회사도 살아남을 수 있다. 새로 출현하는 디스카운트 브로커들은 인터넷을 이용한 콘텐츠 정보사업에서 수익이 나야 버틸 수 있다는 전망이다.

▽고객이 살아남을 증권사를 정한다〓e*미래에셋은 왜 이 시점에 수수료를 무기로 사용했을까. 최도성(崔道成·서울대교수)증권학회장은 “자산운용에 강점을 가진 미래에셋의 궁극적인 전략은 일단 고객을 확보한 뒤 자산종합관리쪽으로 방향을 틀겠다는 것”으로 분석했다. 이제 투자자들은 ‘투자자 중심의 시장’ 문턱에서 어느 증권사를 망하게 할지 직접 고르는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최영해기자> money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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