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은 몰라요”…12세 우크라 소녀가 본 전쟁 연대기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2월 24일 11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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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전쟁을 몰라요
예바 스칼레츠카 지음·손원평 옮김
272쪽·1만5000원·생각의힘


“해가 진다. 우린 평화를 원한다. 예전에 가졌던 꿈이나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뭐였는지 우리는 이제 기억하지 못한다. 예전에 했던 말다툼이나 골머리를 썩던 문제들도 기억나지 않는다. 과거에 품었던 그런 고민은 더는 중요하지 않다. 전쟁 중엔 단 하나의 목표만이 남는다. 살아남는 것. 힘들고 어려웠던 모든 일이 사소해진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숨이 걱정되고, 일상은 ‘쾅’ 하는 소리에 망가진다.”

사고가 성숙해 보이는 이 글은 12세 우크라이나 소녀가 일기장에 쓴 것이다. 전쟁은 어린이를 빨리 어른으로 만든다. 책은 러시아 국경과 가까운 우크라이나 제2도시 하르키우에서 할머니와 살다가 전란을 피해 탈출한 소녀가 쓴 약 두 달간의 일기를 담고 있다.

지난해 2월 24일 러시아의 침공으로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은 생일 파티와 볼링 게임에 활짝 웃던, 하르키우의 아름다운 공원과 북동쪽 외곽 멋진 동네에 있는 자신의 집을 사랑하던 평범한 소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 뛰어다니며 노는 것을 좋아하고, 친구들과 함께 하교한 뒤 숙제를 하고 목욕을 하고 TV를 보고 편안한 잠에 빠지던 소녀는 어느 날 새벽 ‘쨍쨍’ 울리는 금속음에 잠이 깬다. 러시아의 폭격이었다. 급히 지하실로 대피하던 소녀는 두려움에 공황발작을 겪는다. 할머니가 꼭 안아주지만 공포는 가시지 않는다.

이튿날 할머니와 소녀는 정든 집을 떠나 피란을 시작한다.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살아남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학교 코앞에서 탱크가 포탄을 쏴대고, 이웃 동네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마음을 움켜쥔 공포를 억지로 숨긴 채, 나와 거리가 먼 곳에 로켓이 떨어지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신에게 평화를 달라고 요구하며 하루 종일 기도한다. 삶의 매분, 매초에 절실하게 매달린다.”

그래도 소녀는 소녀다. 서쪽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하르키우 출신 동갑내기 친구 리라를 만난 저자는 반나절 동안 즐겁게 떠들며 지낸다. “리라는 창밖의 갈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얘기해서 날 웃게 했다. 어떤 사람들은 어디로 가고 다음에 뭘 해야 할지를 걱정하지만, 그저 갈대에 감탄하는 사람들도 있는 거다. 하하!”

소녀는 피란길에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담담히 적어 나간다. 소녀의 깨달음은 명확하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니 당장 한 시간 안에, 아니 심지어 1분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전쟁이 어떤 건지 모르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다.…전쟁보다 더 끔찍한 것은 없으니까.”

다행히도 무사히 탈출한 저자는 헝가리를 거쳐 할머니와 함께 아일랜드 더블린에 머물고 있지만 고향에서 벌어진 일을 뉴스로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진다. “매일 밤 자기 전에 나는 우크라이나와 하르키우의 뉴스를 찾아본다. 미사일과 로켓은 우리를 절망에 빠지게 한다. 나의 가족들은 지하 대피소에 숨어 있다. 그 생각은 나를 끔찍하고 두렵게 한다.”

‘아몬드’를 쓴 손원평 소설가가 번역했다. 손 씨는 ‘옮긴이의 말’에서 “전쟁이 어떤 것인지 몰라야 하는 연약하고 아름다운 존재들(아이들)을 위해, 역설적으로 우리는 전쟁이 어떤 것인지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하르키우 남동부 흐라코베 지역의 한 포격당한 주택가 앞에 주민들이 모여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하르키우에 살던 12세 소녀 예바 스칼레츠카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흐라코베=AP 뉴시스
우크라이나 북부 하르키우의 한 공터에 쌓여 있는 러시아군 미사일 잔해. 하르키우=AP 뉴시스


조종엽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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