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윤후명’ 짙어질수록 ‘시인 윤상규’의 꿈도 짙어져요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8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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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만의 시집 ‘비단길 편지’ 발간
평생 시인으로 살겠다던 17세 소년… 21세에 등단, 12년 뒤 소설도 당선
소설 인기 끌면서 한동안 시 못 써… 시-소설 함께 쓰면 “박쥐” 따돌린
당시 문단 분위기에도 영향 받아… 시인-소설가 구분, 없애야 할 장벽

26일 서울 종로구에서 만난 윤후명 작가가 시집 ‘비단길 편지’를 든 채 환하게 웃고 있다. 그는 “다음 시집이 언제 어떻게 내 앞에 놓일지 모르지만 그날이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26일 서울 종로구에서 만난 윤후명 작가가 시집 ‘비단길 편지’를 든 채 환하게 웃고 있다. 그는 “다음 시집이 언제 어떻게 내 앞에 놓일지 모르지만 그날이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17세 소년 윤상규는 “평생 시인으로 살겠다”고 다짐했다. 서울 용산고 재학 시절, 그는 성균관대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시로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대학 입학 때는 “왜 철학과를 지망했느냐”는 질문에 “시를 쓰려고 한다”고 답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대중은 대부분 그를 소설가로만 여긴다. 한 출판사조차 그가 시인으로 등단한 걸 모르고 “소설가로서 시 한 편 써 달라”고 요청한 적도 있다. 희수(喜壽)를 코앞에 앞둔 ‘소설가이자 시인’ 윤후명 작가(76)의 얘기다. 그런 작가가 19일 시집 ‘비단길 편지’(은행나무)를 세상에 선보였다.

26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난 윤 작가는 왠지 모르게 비장한 모습. 시인으로 살겠다고 다짐했던 열일곱 살 소년처럼 눈빛이 영롱했다.

“소설가 윤후명으로 살면 살수록 시인 윤상규가 흐려졌어요. 10대 때 스스로 했던 약속을 일흔이 넘어 지키네요. 윤상규가 아닌 윤후명으로요.”

윤 작가는 1967년 본명인 윤상규로 응모한 시 ‘빙하의 새’로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하지만 1979년 필명 윤후명으로 응모한 단편소설 ‘산역’이 또 다른 신춘문예에서 당선된 뒤 소설가로 사랑받아 왔다. 2017년 출간된 윤후명 전집에서 소설집은 ‘강릉’ ‘둔황의 사랑’ 등 12권이었지만, 시집은 ‘새는 산과 바다를 이끌고’ 1권뿐이었다. 신작 시집을 펴낸 것도 ‘쇠물닭의 책’(서정시학·2012년) 이후 10년 만. 시인을 꿈꾼 청년은 왜 소설에 천착하는 일생을 살았을까.

“제가 등단하던 시절만 해도 시와 소설은 함께 못 쓴다는 인식이 강했어요. 둘 다 하겠다고 하면 문단에서 ‘박쥐’라 불렀을 정도였다니까요. 1982년부터 발표하기 시작한 연작소설 ‘둔황의 사랑’이 인기를 끌면서 소설 청탁이 쏟아졌어요. 한참 시를 안 썼습니다.”

‘비단길 편지’에 실린 시 219편에선 60여 년간 쌓아온 필력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어둠이 살얼음처럼 깔린 모래밭은/검푸르게 삶을 휩싼다.’(시 ‘갯메꽃 피는 바닷가’에서) ‘화가들이 드나들며 작업실로 쓰는/옛 면장 집에 하룻밤 묵고/꽃게처럼 뱃시간을 기다린다.”(시 ‘백령도 2’에서)

“(젊은 시절) 미쳐서 시를 쓰던 것이 남아서 소설에 영향을 미쳤어요. 하도 오래 소설을 써 오다 보니 시에도 소설이 남는 것 같아요. 해외에는 시와 소설을 함께 쓰는 작가들이 적지 않아요. 개인적으로 시인과 소설가의 구분은 없어져야 할 장벽이라 믿습니다.”

문학적 스승을 향한 헌사도 시에 담겼다. ‘내 물음은 우물 속을 헤매고 있었지/내 얼굴은 우물 속을 헤매고 있었지.”(시 ‘서촌풍경/윤동주네 우물’에서) ‘다만 언젠가 다시 뵐 날이 멀지 않다고 말씀 올립니다/이것이 만남이라는 것이로구나 혼잣말을 하며/선생님의 뒷모습을 바라봅니다”(‘그러나 그러나, 선생님은 가시다’에서) 윤동주(1917∼1945)와 올해 2월 세상을 떠난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에 대한 그리움이 물씬하다.

“1969년 출판사 삼중당에서 일하면서 이 선생님의 책을 편집한 적이 있습니다. 소설가로 등단하려고 할 때 혹시 문제가 될까 이 선생님이 심사하지 않는 곳만 일부러 찾아다녔어요. 그런데 인연은 어떻게 할 수 없는지 필명으로 응모해 당선된 신춘문예 심사위원이 이 선생님이었죠.”

작가는 앞으로도 시를 계속 쓸까. 하하 너털웃음 속에 우문현답이 돌아왔다.

“어렸을 때 시를 쓰고 싶었는데 평생 소설을 썼습니다. 쓰다 보면 또 어떤 길로 나아갈지 모르죠. 어쩌면 다음 책엔 제 유고시가 담겨 있을지도요.”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소설가 윤후명#시인 윤상규#비단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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