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쁜날엔 기쁘게, 슬픈날엔 슬프게…” ‘도라지’엔 이념도 국가도 필요 없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2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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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북한→한국… 3국 오가며 소설같은 ‘가야금 인생’ 문양숙 명인
총련계 재일교포 3세로 태어나 北 유학 21현 가야금 기대주 됐지만
007작전처럼 韓연주자 만나 귀화… 한국 온지 30년만에 독집음반 내
“정악-산조의 매력에 끌려 한국行… 25현 가야금으로 대중과도 소통”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9일 만난 문양숙 국립국악관현악단 가야금 수석연주자는 “한국 생활이 외롭고 힘들 때는 (정악 기악곡) 상령산을 끝없이 들으며 마음을 달랬다. 전통성에 기반하되 대중적 매력도 갖춘 저만의 음악 세계를 2집, 3집에 계속 펼치고 싶다”고 말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9일 만난 문양숙 국립국악관현악단 가야금 수석연주자는 “한국 생활이 외롭고 힘들 때는 (정악 기악곡) 상령산을 끝없이 들으며 마음을 달랬다. 전통성에 기반하되 대중적 매력도 갖춘 저만의 음악 세계를 2집, 3집에 계속 펼치고 싶다”고 말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한국, 북한, 일본. 세 나라를 오갔다. 그러나 한 송이 예쁜 도라지꽃을 피우는 데는 그 어떤 이념도 국가도 필요 없었다.

문양숙 국립국악관현악단 수석단원(가야금)의 음악 인생을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9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만난 그의 이야기는 한 편의 소설 같았다.

1974년 일본 나라현에서 총련계 재일교포 3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쁜 날엔 기쁘게, 슬픈 날엔 슬프게 현의 떨림으로 날 알아주는” 가야금이 좋았다. 고교 1학년 때는 일본 총련계 학생 가운데 악기별로 단 한 명만 선발하는 평양음악무용대학 전문부에 합격했다. 오사카 조선고등학교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매년 여름방학마다 평양을 방문해 가야금 수업을 받았다.

“일본 니가타항에서 북한 원산까지 배로, 원산에서 다시 평양까지 버스로 2박 3일 이동해 한 달 남짓씩 공부했어요. 북한에 가는 게 무섭지 않았냐고요? 가야금이 태어난 한반도에서 직접 배운다는 게 설레고 즐거울 뿐이었습니다.”

평양에서 고3 졸업 연주회까지 마친 문 씨는 21현 개량 가야금의 기대주가 돼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 돌아와 본 공연 한 편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다.

“한국의 연주자가 난생처음 보는 12현 가야금을 들고 나와 전통 산조를 연주했어요. 명주실의 떨림 하나하나에 소름이 돋았죠. ‘지금까지 내가 뭘 한 거지? 저 연주를 배우고 싶다….’”

모친께 감히 “대한민국에 가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귀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총련계인 주변과 학교의 만류가 대단했다. 007 작전이 시작됐다. 모친은 무작정 부산국립국악원을 찾아 도움을 청했다. 결국 1993년 이지영 가야금 명인(현 서울대 국악과 교수)의 도쿄 공연 소식을 듣고 그가 묵는 호텔을 예약했다. 이 명인은 “새벽 5시, ○○○호실, 내 방으로 오라”고 귀띔했다. 총련계 학생과 남한 예술가의 비밀 만남. 발각되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달이 날 수도 있었다.

“그때 이 선생님의 조언과 권유로 한국에서 공부하고 대학에도 진학하기로 결심했어요.”

그해 5월, 김포국제공항. 난생처음 남한 땅을 밟는 스무 살 문 씨의 가슴은 평양 원산항에 처음 발 디디던 날보다 더 거칠게 뛰었다.

“무서웠지요. 저는 북한 말씨를 쓰는, 북한 악기를 든 사람이었으니까요.”

혈혈단신 공부해 중앙대에서 국악을 전공한 뒤 문 씨는 국립국악관현악단에 입단했다. 2012년 수석 연주자가 됐다. 그가 한국 땅을 밟은 지 근 30년이 돼서야 최근 첫 독집 음반을 냈다. 제목은 ‘DORAJI’. 일본, 북한, 한국에서 모두 사랑받는 민요 ‘도라지’를 택한 것이다.

“1993년 5월, 김포공항에 처음 내리던 날의 기억을 영상처럼 머릿속에서 수도 없이 재생했어요. 그러면서 한 음, 한 음 ‘도라지’의 인트로를 연주했죠.”

단아한 분산화음이 격정적 트레몰로(같은 음을 빠른 속도로 여러 번 치면서 연주하는 주법)와 속주로 이행하는 8분짜리 독주곡 도라지는 문 씨의 인생을 축약한 듯 드라마틱하다. 북한을 대표하는 연주곡 ‘안땅산조’도 재해석했다.

문 씨는 “나를 한국으로 이끈 것은 정악과 산조의 매력이었다. 이를 25현 가야금에 나만의 방식으로 녹여내는 한편 대중과도 소통하고 싶다”고 했다.

꿈이 하나 더 있다. 딸의 한국행을 누구보다 앞장서 도왔던 이. 바로 모친이다. 노모는 일본에 남아 현재 요양원에 계시다고.

새 음반 ‘DORAJI’ 표지.
새 음반 ‘DORAJI’ 표지.
“딸의 음반을 들어보고 싶다는 어머니의 꿈에 이제야 대답을 드리네요. 국제소포로 CD를 보냈는데 재생기기가 없어 못 들으셨다고 해요. CD 속 딸의 사진만 보고 계시다고…. 팬데믹이 끝나면 어머니를 꼭 이 땅, 한국에 모시고 싶습니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가야금 인생#문양숙 명인#도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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