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얕보지 말라” 기자들 대거 한자리 모여 기염[동아플래시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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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년 6월 11일 1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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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04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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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회’라는 언론인모임이 있었습니다. 1921년 11월에 생겼죠. 신문 잡지 통신사에서 일하는 한국인 기자들이 가입했습니다. 친목을 다지자는 목적이 앞섰지만 언론자유도 촉구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언론 탄압을 겪다보니 자연스레 형성된 대응이었죠. 1925년 1월말 열린 무명회 임시총회에서 한 가지 제안이 나왔습니다. ‘전조선기자대회를 열자’는 제의였습니다. 동아일보 정치부장이던 최원순의 발상이었죠.

이 제안은 곧바로 채택됐고 실행에 들어갔습니다. 그해 3월 6일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준비위원 33명을 뽑았습니다. 3‧1운동의 민족대표 수와 같죠. 무명회 회원들 가슴 속에 있던 의식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33명은 언론사별로 조선일보 7명, 동아일보 6명, 시대일보 3명, 매일신보 5명, 개벽 5명, 기타 7명이었습니다. 사회주의 성향의 매체는 물론 동아일보와는 앙숙관계였던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도 받아들였죠.

①동아일보 1925년 4월 3일자 5면에 실린 조선기자대회 광고 ②4월 15~17일 조선기자대회가 열린 천도교기념관 ③조선기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천도교기념관으로 들어가는 기자들
①동아일보 1925년 4월 3일자 5면에 실린 조선기자대회 광고 ②4월 15~17일 조선기자대회가 열린 천도교기념관 ③조선기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천도교기념관으로 들어가는 기자들


3월 18일 2차 준비위원회에서 기자대회 취지서를 채택했습니다. 첫 문장이 ‘언론은 권위가 생명이다’였습니다. 여기엔 일제 탄압으로 인한 울분이 배어 있죠. 걸핏하면 삭제, 여차하면 압수였으니까요. 1년 전 ‘언론‧집회 압박 탄핵회’도 당일 금지당한 형편이었습니다. 사실 기자대회도 총독부가 매일신보와 대동신보 기자들도 포함시키라고 한 요구를 받아들인 끝에 허가됐습니다. 대동신보는 친일단체 대동동지회 기관지였죠.

4월 15~17일 열린 최초의 기자대회에는 무려 723명의 기자들이 신청했습니다. 1925년에 그렇게 기자들이 많았나 싶습니다. 지방 매체 기자라도 한국인이면 참가할 수 있었고 지국과 분국 기자들에게도 문을 열어준 결과였죠. 가급적 많은 기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세를 높이려는 의도라고 풀이됩니다. 억눌려 제대로 기사도 쓰지 못하던 기자들이 ‘우리를 얕보지 말라’고 기염을 토하는 한마당인 셈이었죠.

①1925년 4월 15일 조선기자대회 첫날 선출된 의장 이상재 조선일보 사장 ②부의장 안재홍 
조선일보 주필 ③1925년 3월 15일 조선기자대회 준비위원회에서 선임된 상무위원 신철 해방운동 기자 ④같은 날 선임된 상무위원 
이능우 매일신보 기자 ⑤역시 같은 날 선임된 상무위원 최원순 동아일보 정치부장 ⑥1925년 4월 3일 열린 준비위원회에서 추가 
선임된 상무위원 박창한 조선일보 기자 ⑦같은 날 추가 선임된 상무위원 한위건 동아일보 기자 ⑧조선기자대회 때 사용된 휘장
①1925년 4월 15일 조선기자대회 첫날 선출된 의장 이상재 조선일보 사장 ②부의장 안재홍 조선일보 주필 ③1925년 3월 15일 조선기자대회 준비위원회에서 선임된 상무위원 신철 해방운동 기자 ④같은 날 선임된 상무위원 이능우 매일신보 기자 ⑤역시 같은 날 선임된 상무위원 최원순 동아일보 정치부장 ⑥1925년 4월 3일 열린 준비위원회에서 추가 선임된 상무위원 박창한 조선일보 기자 ⑦같은 날 추가 선임된 상무위원 한위건 동아일보 기자 ⑧조선기자대회 때 사용된 휘장


천도교기념관에서 열린 대회 첫날에는 의장에 이상재, 부의장에 안재홍이 뽑혔습니다. 이상재는 조선일보 사장, 안재홍은 조선일보 주필이었습니다. 기자대회 참가 신청자 중 조선일보 소속이 303명이나 됐던 점이 반영된 듯합니다. 신청자가 모두 참석하진 않았지만 조선일보 소속 참가자들이 단연 많았거든요. 또 첫날에는 교섭위원 3명도 뽑았습니다. 개막 전날 종로경찰서로 붙잡혀 간 준비위원회 상무위원 신철을 풀어달라는 임무를 맡았죠.

사회주의 잡지 ‘해방운동’ 기자인 신철은 참가자 명단을 달라는 일제 경찰의 요구를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바로 유치장에 갇히게 됐죠. 이유는 ‘거주규칙 위반’이었습니다. 경성에 살면서 거주계를 내지 않았다는 구실을 들이댔죠. 일제 경찰의 기막힌 탄압수단이었습니다. 신철은 대회 이틀째인 16일 풀려났죠. 일제는 대회 기간 내내 정사복 경찰 수십 명을 배치해 감시의 눈길을 번득였습니다.

①1925년 4월 15일 개막한 조선기자대회 개회식 모습 ②조선기자대회 개막일 마지막 행사로 진행된 
신문강연회 ③1925년 4월 16일 조선기자대회 둘째날 만장일치로 가결된 5개 항 결의문. 3항과 4항은 일제 경찰이 발표를 
금지해 싣지 못했다.
①1925년 4월 15일 개막한 조선기자대회 개회식 모습 ②조선기자대회 개막일 마지막 행사로 진행된 신문강연회 ③1925년 4월 16일 조선기자대회 둘째날 만장일치로 가결된 5개 항 결의문. 3항과 4항은 일제 경찰이 발표를 금지해 싣지 못했다.


둘째 날엔 결의문 5개 항목을 채택했죠. 언론의 권위를 신장, 발휘하고 신문과 출판물의 현행 법규를 근본적으로 고치며 대중운동의 적극적 발전을 촉구한다가 3개 항목입니다. 나머지 2개 항목은 일제가 발표를 금지했습니다.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구속하는 모든 법규를 없애고 동양척식회사 등 조선인 생활의 기반을 침식하는 각 방면의 죄상을 적발해 대중의 각성을 촉구한다는 것이었죠. 마지막 날엔 천도교 별장인 상춘원에서 친목회가 열렸습니다.

①1925년 4월 17일 천도교 별장인 상춘원에서 열린 친목회에 가는 기자들 ②상춘원 친목회장을 내려다본 모습. 대형 천막이 여러 개 설치되어 있다.
①1925년 4월 17일 천도교 별장인 상춘원에서 열린 친목회에 가는 기자들 ②상춘원 친목회장을 내려다본 모습. 대형 천막이 여러 개 설치되어 있다.


그런데 둘째 날인 16일 경성에서 고려공산동맹 대회가, 17일엔 조선공산당 창립대회가, 18일에는 고려공산청년회 창립대회가 비밀리에 열립니다. 일제 경찰이 기자대회에 정신이 팔린 틈을 노렸습니다. 기자대회가 물밑에서 사회주의자들이 벌인 연막작전이었다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죠. 기자대회에 참석한 지방 기자들의 절반 이상이 사회주의 성향이었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기자대회 현장에서도 북풍회 계열 사회주의 기자들의 목소리가 아주 컸습니다. 이제 사회주의자들이 없는 곳은 찾기 힘들게 됐습니다.

이진기자 leej@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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